투 머치 토커

별 얘기 없겠지 하고 유튜브 영상을 찍다가 30분 이상 얘기하게 되는 상황을 보면 내가 '투머치토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금 딱지가 필요한 동기부여 영상

수세기 전 칼 마르크스가 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은 두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몸에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의 부정적 측면 하나, 그렇게라도 인민을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 하나.

갑자기 칼 마르크스의 이 말이 생각난 이유는 최근 동기부여라는 유령이 직장인의 아편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편은 극도로 심각한 상황에서 고통을 경감시키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제대로 된 처방없이 사용하면 몸을 망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이먼 사이넥이 테드에서 강연한 ‘Start with Why’라는 영상에는 ‘사업가 Only’ 딱지를 붙여 일반 직장인이 시청할 수 없도록 금해야 한다. 영상에서는 왜 그 일을 하는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것을 강조한다.

 

사업가의 Why

Why로 시작해 How와 What을 도출해 낸다는 것이 영상의 핵심이다. 사람은 목적의식 없이는 몰입하고 헌신할 수 없으니까 이 개념은 너무나 훌륭하고 당연한 개념이라고 수 년간 여겼었다.

 

그런데 최근 좀 더 냉소적으로 되어서일까. 이 개념이 일반 직장인들에게 얼마나 헛소리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 사업가가 사업을 시작할 때 문제와 고객군을 먼저 정의한다. 사업가에게 ‘Why?’는 너무나 중요하다. ‘어떤 특정 대상 고객들이 특정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Why)’ 나는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떻게(How) 무엇(What)을 할지는 당연히 그 후로 따라오는 것이다.

 

 

 

온라인 쇼핑의 예를 들어서 얘기해 보자. 사업가는 돈을 벌기 위한 마음보다 더 숭고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실은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더라도) 이렇게 ‘Why’, ‘How’, ‘What’을 정의할 것이다.

 

  • Why – 오프라인 쇼핑에서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쇼핑을 하는 세상을 만들고 말겠다.
  • How –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편리하게 상품을 받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 What – 온라인으로 쇼핑을 할 수 있는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겠다.

 

꽤나 숭고한 목표의식이며, 개연성 있는 흐름이다. 그런데 때로는 비전이 현실 앞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어떤 사업가가 직장인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각각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비전(Why)을 추구했다고 해보자.

 

그래서 직장인끼리 서로 소개 받아 만날 수 있는 앱을 만들었다. 그런데 사용자들은 동성을 소개 받을 경우 만남을 기피했고, 이성간의 만남을 선호했다. 이것을 보고 사업가는 앱을 소개팅앱으로 피버팅 했다.

 

실제 사업의 진행 상황에 따라 사업가의 Why는 ’남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로 변해 버렸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사업가는 언제나 비전을 중시하고 강조해야 한다. 아편같은 자기 최면이다. 스티브잡스가 보여줬다는 ‘현실왜곡장’과도 비슷한 개념이다.

 

피고용인의 Why

반면, 이 회사에 고용된 개발자가 이 회사를 선택할 때 사업가의  ‘Why’를 고려했을까? 고려한 사람이 극소수이겠으나 대부분은 사업가의 ‘Why’가 아닌 스스로의 ‘Why’를 고려했을 것이다.

 

어떤 개발자는 회사에 입사한 후에 회사의 비전에 공감하고, 사람들이 더 편리하게 온라인 쇼핑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힘을 다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상황은 ‘Why’로부터 시작된 탑다운 접근이 아닌, 내가 이 일을 했더니 사업가가 원했던 ‘Why’가 이루어진 결과론적인 상황일 뿐이다. 자신의 사업을 스스로 시작하지 않는 한 사업가의 ‘Why’는 피고용인이 먼저 시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 피고용인의 ‘Why’, ‘How’, ‘What’은 어떤 모습일까?

  • Why – 난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 How – 내가 가진 기술을 효과적/효율적으로 사용해서
  • What – 회사에서 시키는 일들을

 

피고용인의 Why는 항상 생계유지가 되어야 한다. 물론 성장과 성취 등도 고려대상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생계유지라는 최우선 조건이 만족되었을 때만 성립하는 얘기다. 피고용인은 돈을 받기 위해 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내가 동기부여 영상에서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피고용인의 Why는 생계유지일 수 밖에 없는데, 대부분 더 “숭고한” Why를 찾으라고 강요한다. (생계유지보다 숭고한게 딱히 더 있나?)

 

사업가의 Why, How, What은 뾰족해서 자신의 사업에 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피고용자의 Why, How, What은 무난하게 어디에나 잘 맞아야 한다. 이것이 피고용인들이 이직을 할 수 있는 이유다.

 

 

사이넥 역시 이 영상을 소개할 때 ‘성공한 리더의 공통점’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리더는 자신의 사업을 영위하는 사람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상은 ‘출근하기 싫은 직장인이 봐야하는 영상’ 등으로 곳곳에서 소개되고 있다.

 

Why를 강조하는 사이넥의 영상은 사업가를 위한 것이다. 재벌 자녀가 마약을 하면 구하기도 쉽고, 설사 발각되어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서민은 어쩌다 마약을 맛보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구할 수도 없고 걸리면 인생 종친다. 동기부여라는 아편을 피고용자들이 별 생각없이 받아 먹으면 안되는 이유다. 내가 피고용자인 이상 돈을 버는 것이 나의 가장 숭고한 목적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3줄 요약

  • 사업가의 Why와 피고용인의 Why는 다르다
  • 피고용인이 사업가의 Why를 체득했더라도 그건 Why로부터의 시작이 아닌 결과론적인 것이므로 동기부여와는 상관이 없다
  • 피고용인은 돈을 벌겠다는 피고용인만의 숭고한 Why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유튜브 알고리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다 보면 구독자 100명, 1000명 등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이 버프를 받게 해준다는 얘기가 종종 들린다. 2천명 이상의 구독자를 확보해 보고, 최근 개설한 채널의 구독자가 100명을 넘어선 시점에서 관찰해 보면 확실히 알고리즘 버프가 있는 시기가 존재한다. 플랫폼의 큐레이션 파워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현상을 보면 여전히 무력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잘하느냐 못하느냐, 내 영상의 내용이 좋으냐 나쁜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유튜브느님의 간택을 받느냐 못받느냐에 따라서 내 모든 흥망성쇄가 결정난다는건 너무 슬픈거 아닌가...


이준석의 딜레마

살아있는 권력의 초기에 대놓고 태클을 걸고 있는 이준석. 이준석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순간 바로 제거될 것 같다. 최근의 기자 회견과 방송 활동으로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관심을 지속적으로 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미 문제의 핵심을 드러낸 폭탄 발언들은 다 나왔고, 계속 관심을 끌려면 자극적인 요소가 계속 나와야 하는데 그건 쉽지 않다. 그러니 팩트 위주로만 말하던 것에서 다른 사람의 의중을 짐작해서 말을 하게 되고, 이건 틀릴 가능성도 높거니와 타인의 심중을 확인할 방법도 없다. 아니면 취임식 카메라에 잡혔니 안 잡혔니 하는 지엽적인 이슈들을 생산하게 된다. 나는 이준석이 이 상황에서 살아남아서 변화를 만들어 내기를 바라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오너십 -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열쇠

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을 해야 합니다. 문제를 올바르게 정의하는 것만으로 90%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제에 대한 인식은 중요합니다. 올바른 질문은 올바른 답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정확하게 식별되었다면 문제 상황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5 why’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상황의 복잡도 따라서 ‘100 why’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점차 문제의 실제 원인에 접근해 갑니다. 실제 원인이 중요한 이유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들을 해결하는 것은 중간 과정의 현상을 없앤 것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면적 현상을 없애고 나면 문제의 진짜 원인이 남아있으므로 머지 않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하거나 더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여 현시점에서 가장 최적의 솔루션을 고민하는 것이 전략입니다.

각 나라별 문제 해결이라는 그림을 보면 선입견이 보이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독일의 깔끔한 문제 해결 방식이 보이고, 용병을 사서 자신들의 까다로운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미국의 모습도 보입니다.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묻어 버리는 중국 공산당의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원래 이 그림에는 대한민국은 없었는데, 누군가가 끼워 넣은 모양입니다. 한국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다른 두 가지의 문제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작용이 발생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겁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문제의 원인을 본질까지 파고 들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원인은 제대로 파악했으나 잘못된 솔루셔닝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직원들의 이직율이 높다면 어떤 원인이 있을까요? 월급이 작을수도 있고, 자신이 맡은 일에서 충분히 성취를 느끼지 못해 직원들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상사의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회사 자체가 싫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이직율이 높은 상황에서 경영진이 취한 조치가 인터넷 상에 유머로 돌아 다닌 것을 봤습니다.

신입사원의 이직율이 높다 → 40대 사원을 멘토로 붙이자

여성사원의 이직율이 높다 → 경영진과 여사원들의 회식을 정기적으로 열자

젊은 사원들의 이직율이 높다 → 휴일에 젊은 사원들에게 스터디그룹&회식을 시키자

이 조치를 실행한 이후 이직율은 더 치솟고 있다는 글을 덧붙였습니다. 전형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고, 잘못된 솔루션을 적용한 예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를 산책하면서도 비슷한 장면을 봤습니다. 반려견 소변 금지는 누구를 대상으로 한 팻말일까요?개는 팻말을 읽지 못하니 당연히 개를 산책시키는 주인들을 대상으로 했을겁니다. 그런데 개를 산책시켜 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개들 데리고 가던 중에 개가 갑자기 앉아서 쉬를 할 때 주인이 자제시킬 방법이 있나요?

여기서 문제는 매우 명확합니다. 강아지가 보도블록 위에 소변을 보면 냄새가 심하게 나고, 빠른 시일 내에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씻겨지지도 않을겁니다. 주민들은 악취에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합니다. 관리사무소는 계속되는 민원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붙인 이 팻말이 불편한 이유는 이 팻말은 문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팻말은 그저 관리사무소는 할 만큼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팻말을 읽지 못하는 개와 개의 소변을 통제할 수 없는 개 주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 뿐입니다.

보도블록에 개들의 소변 때문에 나는 악취를 잘 해결할 방법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방법은 찾아야겠죠. 그러나 문제 해결이 아닌 팻말로 관리사무소는 자신들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겼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벽에 보기 싫은 팻말이 하나 붙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진짜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기 보다 이런 가짜 솔루션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 들어가고, 그에 대한 최선의 솔루션을 내놓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많은 생각이 필요한 과정이지만, 깊게 생각하기는 힘이 들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해결책 같아 보이는 것을 제시하고, 자신이 뭔가를 했다는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게다가 이런 가짜 해결책을 제시하고 나면,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너십’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문제를 진짜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깊이 고민하고,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오너십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위에서 예로 들었던 것들을 솔루션이라고 제시하고 나몰라라 하지는 않았을겁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척하지 않고,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