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진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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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하라리는 특히 진실이 훼손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포퓰리즘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권력 투쟁으로 환원된다. 진실은 각자의 입맛에 맞게 변조된 무기가 되고, “누구의 진실인가?“라는 질문이 날카롭게 떠오른다. 언어마저 훼손된 사회에서 공통의 객관적 현실은 사라지고, 진실을 주장하는 것은 곧 권력을 위한 계략으로 치부된다. 하라리는 이런 상황에서 언론 같은 견제 장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견제 기관의 건전성을 지키는 노력 없이는 민주주의와 진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진실과 재현의 관계다. 하라리는 진실이란 현실을 1:1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면을 강조하고 다른 면을 무시하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진실이 발전의 기본 요소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거짓으로 선동된 사실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이 없다. 우리가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속성을 논하는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탈린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일화였다. 스탈린은 자신을 소련 권력의 구현체로 보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이는 권력이 개인을 넘어서는 상징으로 기능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모습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인플루언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 브랜드화되거나, 기업들이 개별 상품이 아니라 집단적 아이덴티티를 앞세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권력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지만, 때로는 그 시스템에 압도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관료주의에 대한 하라리의 통찰은 흥미로웠다. 관료주의는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하라리는 그것이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관료제는 혼란을 통제하고 질서를 제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하라리는 이 틀 안에서 최소한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민주적 방식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그것이 유지 가능한 적절한 규모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매우 설득력 있었다.
하라리는 질서와 진실 추구의 상충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은 질서를 흔드는 의구심과 논쟁을 동반한다. 따라서 강력한 자정 장치는 사회 신화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최소한의 법과 규율로 균형을 잡는 일이야말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포퓰리즘의 권력 독점 욕구에 대해 다루는 대목은 특히 현실적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국민을 대변한다고 믿으며, 자신들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반국가적으로 규정한다. 이는 독재로 가는 뻔한 길이지만, 이런 단순한 사고방식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라리는 이런 사고가 가져올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집단적 의식이 이를 견뎌낼 가능성을 제시한다.
넥서스
결정론 속의 자유: 사고가 만드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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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철학적으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분명 자유롭게 선택을 내리는 존재라고 느낀다. 점심 메뉴를 고르고, 읽을 책을 선택하는 순간, 모든 결정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실감이 든다. 하지만 이 선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무엇이 선택을 만들어 내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기저에는 흥미로운 질문이 숨겨져 있다. 과연 인간의 선택은 완전히 자유로운가?
인간의 선택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무의식은 마치 함수처럼 입력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출력이 나오는 원리를 따른다. 특정 상황에서의 반응은 이미 학습된 과거 경험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대부분 결정된다. 하지만 이 함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함수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인간의 사고와 배움에서 비롯된다. 이는 자유의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자유의지는 선택의 순간에 무엇을 고를지 결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함수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능력에서 발견된다.
함수는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에 의해 생성된다. 유전자, 성장 배경, 사회적 환경 등 초기 요소들이 함수의 기반을 이루며, 그 이후 인간은 학습과 경험, 사고를 통해 이 함수를 점진적으로 수정해 나간다. 중요한 점은 이 변화가 느리다는 것이다. 함수는 한 번에 급격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고와 배움이 반복되면서 천천히 재구성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무의식적인 반응을 넘어 더 탄탄하고 나은 함수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핵심이 된다.
깊은 사고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비판적 사고를 통해 기존의 전제를 검토하고, 반성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되짚으며, 통합적 사고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결합한다. 이러한 사고 과정이 뇌의 시냅스를 재구성하며, 결과적으로 함수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즉, 사고는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다.
결국 자유의지는 입력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측정될 수 없다. 자유의지는 우리가 사고하고 배우는 모든 순간에 작용하며, 함수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 변화는 더 나은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을 단순한 입력-출력의 기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오히려 희망적이다. 사고와 배움이 쌓이는 한, 우리는 결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자유의지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변화와 성장의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본질적인 힘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 이 과정이 쉽지 않고 느리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온라인 인민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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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힘이 커지며, 이해 당사자가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더 이상 권력자나 소수 엘리트만이 자신의 의견을 대중에 전달하는 시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개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고, 이는 직접민주주의로 한 발 더 나아가는 기술적 진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순기능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여론이 법적 절차를 대체하려는 현상은 단순히 목소리의 민주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부 빅마우스가 여론의 장을 장악하면, 소수의 부적절한 의견이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왜곡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특정 주제에서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소수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다수의 침묵하는 목소리는 묻혀버린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서도 그러한 왜곡이 반복되었다. 결국 여론은 모두의 의견을 담아내지 못한 채 특정 방향으로 기울어져 본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
최근에는 이른바 ‘떼법’ 현상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정 집단이 감정적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사안이 실제 법적 논리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집단의 요구가 여론을 통해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하며, 결과적으로 법의 형성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안은 처음부터 합리적 논의에 기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이후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법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반으로 해야 하지만, 떼법이 이를 넘어서는 순간 사회는 불안정해질 위험에 직면한다.
법과 여론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법은 최소한의 방어막으로서 억울한 피해를 방지하고, 사적 제재를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여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법은 냉철한 객관성과 규범을 기반으로 하지만, 여론은 감정적이고 때로는 변덕스럽다. 두 영역을 동일선상에 두는 순간, 사회는 법적 안정성을 잃고 혼란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현재의 인터넷 인민재판은 과거 마녀사냥의 현대적 변형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한 끝에 제도적 법이 생겨났지만, 오늘날 여론의 힘과 사적 제재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듯하다. 정반합의 관점에서 이 현상은 여론이 법을 보완하되, 법적 영역을 위협하지 않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군중의 목소리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면서 법의 영역은 여전히 확고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법이 감정의 흐름에 흔들리는 순간, 사회는 일관성을 잃고,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 속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론과 군중의 힘은 법이 미처 다루지 못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론이 법을 대체하거나, 법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떼법의 가장 큰 문제는 법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데 있다. 법은 시간과 경험을 통해 다듬어진 공정한 절차를 따르고, 그 기반에는 사회적 합의와 객관적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떼법은 강한 감정적 공감이나 일시적 여론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법의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기능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면 법은 사회적 신뢰를 잃고, 단기적인 해결책만을 쫓는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여론과 법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여론은 법이 간과한 점을 지적하고 감정적 공감을 끌어내지만, 법은 그 모든 감정을 제도화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법의 기본적인 기능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여론과 군중의 힘은 필요한 변화를 요구하되, 그 변화가 법적 절차와 객관성을 통해 검증받아야만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
카를로 로벨리에게 답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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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에게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에 대해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답장이 왔고,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보았지만, 자동 응답이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백 통의 메일을 받기 때문에 개인적인 답변은 할 수 없으며, 세미나 요청 같은 것도 모두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스팸 메일 속에서 살며 이를 차단하려 애쓴다. 하지만 로벨리 같은 학자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팸과 다른, 진지한 제안이나 아이디어 공유 메일조차 스팸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렇게 중요한 아이디어가 묻혀버릴 수도 있는 상황은 “스팸 아닌 스팸”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중요한 메일을 구별할까? 혹시 그가 공개한 Gmail 주소는 단순히 스팸 메일을 처리하기 위한 창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이메일 주소를 공개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사람들의 기대를 조정하는 데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이메일 주소를 찾아낸 사람이 보낸 메일이라면 조금 더 신중히 검토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메일을 받는 상황에서 모든 메일에 일일이 응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학자는 건전한 아이디어 공유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열어두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 일을 계기로 학자와 대중 사이의 소통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메일과 단순한 스팸 메일을 구별할 수 있는 더 나은 시스템이나, 대화의 문턱을 낮추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공개된 이메일이 소통의 창구가 아니라 벽처럼 느껴질 위험이 있다.
로벨리와 같은 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의 소통이 더욱 풍부해질 방법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건전한 아이디어가 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의미 있는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통제가능성과 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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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가능성과 결과는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한다. 그것이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통제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조직에서도 이 현상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관리자는 통제할 수 있는 요소에 집착하며, 그것이 조직의 성과를 보장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성과의 핵심은 때로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결정되곤 한다. 시장의 변화,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 외부 환경의 충격은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며,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와 무관하게 결과를 좌우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시장의 요구나 기업의 상황과 같은 외부 요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통제 가능한 부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통제 가능성을 넘어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과를 만드는 데 있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더 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를 통해 우리는 통제 가능성과 결과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에서나 조직에서나, 완벽한 통제란 없다. 중요한 것은 통제의 환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오는 실패와 좌절을 배우고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 우리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진정한 성과는 종종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서 결정된다. 이런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더 유연하고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비웃음을 소화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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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새로운 시도를 비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신입사원 시절 겪었던 한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리더십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몇몇 대리들이 “네가 리더도 아닌데 왜 리더십 책을 읽느냐?”며 비웃음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의 비웃음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리더십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미리 준비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리더가 될 기회가 왔을 때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리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웃음은 두 가지 이유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리더십 공부를 정말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경우다. 그렇다면 그들은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해, 공부하는 나를 불필요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치부한 경우다. 어느 쪽이든 이는 결국 안타까운 일이다. 한쪽은 무지로 인해 자신의 성장을 막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남을 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하지 않는 일을 비웃는다. 이는 내가 읽은 그랜트 카돈의 책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남들의 비웃음에 신경을 쓸수록 우리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서 멀어진다. 반대로, 자신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과 본질에 대한 집중은 비웃음마저도 불필요한 소음으로 만든다. 나는 당시 비웃음 대신 리더십 공부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남들의 비웃음이 아니라 나의 성장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웃음은 변화를 거부하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작은 몸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비웃음을 넘어설 때, 우리는 더 큰 성장과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비웃음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성장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그런 노이즈를 뛰어넘을 힘을 가지고 있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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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4시간 감시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AI 스피커, 컴퓨터 같은 기술은 우리의 말을 듣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튜브 영상을 추천하거나 상품 광고를 보여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처럼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편리함이 보안에 대한 불안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스마트 기기들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편리함을 제공하며, 사람들은 이런 효용을 당연한 대가로 여긴다. 하지만 데이터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서는 쉽게 체감하지 못하거나, 체감하더라도 외면한다. 결국 우리는 이런 구조에 익숙해지며, 데이터 제공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기업들이 데이터 활용에 대해 “파편화”와 “익명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상황을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편화”는 데이터를 개별적으로 저장해 특정 개인을 바로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고, “익명화”는 데이터와 개인의 연결성을 차단해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술은 표면적으로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파편화된 데이터조차 특정 알고리즘과 기술을 통해 쉽게 재조합될 수 있으며, 익명화된 데이터도 다른 데이터와 결합하면 개인 식별이 가능해진다. 이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치명적인 허점이다.
또한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고는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구조는 사용자에게 사실상 선택권을 박탈한다. 데이터를 거부하면 서비스 이용이 어렵고, 데이터를 제공하면 어떻게 활용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게 된다. 익명화와 파편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행동과 맥락이 기록되고, 특정 개인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위험을 마주할 능력이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편리함과 보안 사이의 균형이다. 우리는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데이터를 제공하는 행위의 의미를 점점 가볍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익명화와 파편화가 반드시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데이터를 통해 기술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데이터를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통제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편리함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한다.
무엇이 프로젝트를 복잡하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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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기술적인 복잡도보다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난이도를 높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커뮤니케이션의 수와 범위가 확장될 때 그 영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세 명이 논의할 때와 네 명, 다섯 명이 논의할 때의 커뮤니케이션 채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는 단순히 사람 수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이 내부 팀 내에서만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다른 팀 또는 외부 파트너와 함께 진행되는가에 따라도 난이도가 크게 달라진다. 팀의 경계를 넘어서는 크로스 팀 커뮤니케이션이나 외부와의 협력은 더욱 복잡해지고, 조정의 어려움이 가중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난이도를 높이는 또 다른 요소는 ‘컨텍스트’의 차이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에서 비즈니스와 개발이라는 두 관점이 만날 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결과물의 속도와 시장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개발 측면에서는 기술적 완성도와 시스템의 안정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목표 자체가 다르고, 지식의 베이스가 다르기에 대화에서 이해관계의 차이와 소통 방식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목표와 이해 수준을 조율하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거나, 논의 자체가 더디게 진행되거나, 심지어는 논의 자체가 정체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조정자가 필요하다.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기술적인 전문성까지 갖추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조정자가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답답한 상황만 반복된다. 그러나 단순히 조정의 역할을 넘어서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바로 DRI 역할을 맡아 리더로서 전체 상황을 통합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다. 이들은 단순한 진행의 조율을 넘어서서 프로젝트의 최종 책임자로서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고, 팀이 멈추지 않도록 끌어가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조정자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프로젝트가 예측 가능한 지연 수준을 넘어선다. 일정 조정이나 일시적인 수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해결될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한 지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모든 팀원이 방향성을 잃고 답보 상태에 빠지며, 프로젝트의 동력과 팀의 사기는 바닥을 친다. DRI 역할을 하는 리더가 없다면, 팀은 손을 놓은 채로 길을 잃고, 누구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다.
결국 프로젝트의 성공은 리더의 유무와 역량에 크게 달려 있다. 프로젝트가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할 때, 프로젝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팀을 이끌어갈 수 있는 DRI의 존재가 프로젝트의 운명을 가른다.
나의 스트레스 관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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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를 다루기 위해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트레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본질적인 문제와 감정을 분리해보면 문제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 줄어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느끼는 순간에는 이 분리가 쉽지 않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최근 내가 만들어 본 스트레스 대처 체크리스트는 이러한 필요에 맞춰 간단하고 효과적인 접근법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사실과 감정을 분리하기’다. 일이 발생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그로 인해 생긴 감정이 섞이면 문제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객관적인 사실이 어떤지 먼저 파악하고, 그 사실로 인해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명확히 구분하면 문제 해결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업무와 관련된 갈등에서 유용하다. 상대방의 행동이나 상황이 내 감정을 자극하더라도, 그 감정에 빠지지 않고 일에 집중하려면 이 구분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휴식 후 다시 사고하기’이다. 문제가 복잡하게 느껴지거나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잠시 쉬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최근에도 나는 스트레스가 가득한 상태로 하루를 마쳤지만, 잠을 자고 나니 생각이 맑아지고 문제에 집중할 힘이 생겼다. 그 상태에서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 나니 복잡하게 얽혔던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도구인 밀라노트를 활용해 시각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점차 긍정적인 감정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잠시 쉬며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해결책이 더 명확해지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가 1년 후에도 나를 괴롭힐지 생각해보기’라는 항목이다. 눈앞의 문제는 크게 느껴지지만, 조금 더 먼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생각보다 사소할 때가 많다. 만약 1년 후에도 이 문제가 나를 괴롭힐 만큼 중요한지 자문해 보면, 지금 당장 큰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현재의 감정적인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다.
이 세 가지 체크리스트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실천하기에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다. 물론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를 매번 기억하기는 쉽지 않지만, 반복적으로 실천하다 보면 나만의 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들을 습관화해 나가면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스트레스 대처 방식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 것이라 기대한다.
현명한 존재는 무리에 섞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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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르 봉의 ‘
개인이 아닌 군중의 특성은 훨씬 더 단단하고 굳건하다. 예전에는 나무 가지가 해를 향해 자라듯이 어느 정도 방향성을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군중의 특성을 ‘굵은 나무 등걸’에 비유하고 싶다. 단단히 자리 잡고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 나무 등걸처럼, 군중은 하나의 고유한 집단 의식을 갖는다. 그렇기에 제도와 법은 군중의 마음을 바꿀 힘을 갖기 어렵고, 오히려 군중의 특성이 법이나 관습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는 듯하다. 개인으로서는 이런 군중의 흐름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흐름에 순응하며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잘 타고 넘어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며 생각난 또 다른 점은, 회사 생활에서 느끼는 조직의 문화와 군중 심리의 강력함이었다. 많은 경우, 회사의 상위 리더십은 내가 중요하게 여겨온 원칙이나 기준을 이론적으로는 지지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군중의 흐름을 따르게 된다. 결국 다수의 합의에 따라 암묵적으로 형성된 문화는 개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 점에서 르 봉이 말한 “군중을 지배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진 지금, 군중 심리를 이해하는 일이 적어도 군중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길”이라는 문장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어쩌면 군중의 흐름을 완전히 이해하고 이를 수용할 줄 아는 태도만이 개인으로서 무리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신념과 현실의 괴리는 업무 스트레스로 이어지곤 한다. 마이클 조던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감독을 하지 않기로 한 이유를 “요즘 선수들이 게임을 대하는 마인드가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비슷한 생각이 들어, 한때 당연하다고 여겼던 원칙들이 무시될 때면 마치 내가 가진 기준 자체가 과거의 잣대에 불과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때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옳음이라는 것이 결국 주관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다수의 합의가 반영된 상대적 기준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때로는 스스로가 ‘기득권’에 사로잡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크레타 벽화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만이 시대와 상황이 변할 때마다 되풀이된다면, 지금 내가 맞닥뜨리는 괴리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닌지, 나의 기준을 조금은 유연하게 바꾸어 보아야 하지 않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개인적 신념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또한 군중 심리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속에서 나의 역할을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맡은 바 일을 묵묵히 수행하며, 군중의 흐름 속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신념과 현실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유연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기준을 조금씩 조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군중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균형을 유지하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