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대기업 그룹처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대기업 그룹의 운영 방식과 닮아 있다. 시장에서 가장 인정받는 회사 일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을 카메라, 책, 그리고 컴퓨터 업그레이드 같은 활동에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선 삶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대기업 그룹이 수익성이 높은 계열사를 통해 번 돈으로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며 전체적인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듯, 나 또한 잘하는 일을 통해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좋아하는 활동에 투자하며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잘하거나 좋아하는 일이 반드시 돈을 벌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촬영이나 독서처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이 정신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경제적 보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시장에서 인정받는 일에서 성과를 내며, 번 돈을 나만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내 삶을 유지하는 중요한 구조가 된다.

회사의 성취는 내 능력을 입증하고 보람을 느끼게 한다. 사진은 정신적인 힐링을, 독서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을 준다. 컴퓨터 업그레이드는 생산성을 높이며 도구로서의 가치를 더한다. 이 모든 활동은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기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중심을 둔다.

특히 사진을 찍으며 느끼는 힐링이나 독서를 통한 상상의 여행은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을 덜어준다.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끌리는 활동을 선택하며, 계절의 변화나 특별한 날에 의미를 부여하듯,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새롭게 만들어 간다.

삶은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직선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풍요로움 속에 의미가 있다. 대기업 그룹이 다각화된 구조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성장을 도모하듯, 나 또한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적절히 배합해 나가며 내 삶이라는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 방식은 나에게 성취와 만족을 동시에 안겨주며,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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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생기면 책임지실거에요?

“그런 일이 생기면 책임지실거에요?“라는 말은 어쩌면 너무 익숙하다. 우리는 종종 이 말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책임을 묻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나는 그 일을 절대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심리가 반영된 표현이다. 문제는 이 태도가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조직의 발전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이 말이 가지는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작은 리스크를 침소봉대하는 심리다.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근거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미래에 다가올 잠재적 기회를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다. 불확실성은 인간이 마주해야 할 기본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과도하게 확대해 해석함으로써, 가능성과 도전을 스스로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다. 새로운 일을 시도했을 때 예상치 못한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공포는 인간의 기본적인 방어 기제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고, 결국 정체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조직에서 도전을 두려워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그 조직은 발전보다는 정체와 퇴보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말로 일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표현 대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먼저 진행해 보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아 보시죠.” 이 한마디에는 책임 회피가 아니라 도전 의식이 담겨 있다.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은 문제를 핑계로 행동을 거부하기보다는, 일단 시도한 후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태도가 훨씬 더 생산적이다.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책임을 두려워하기보다 성과와 해결을 목표로 삼는다.

정작 발생하지도 않은 일을 근거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면서 실패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고, 실패 후에는 대처하고 배우는 과정이다.

결국, “그런 일이 생기면 책임지실거에요?“라는 말은 거부와 두려움을 표현하는 문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은 기억해야 한다. 정체된 삶과 조직은 위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험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는 행동일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행동하고, 책임을 질 각오로 나아갈 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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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지옥이다

우리는 하루의 상당 시간을 화면을 바라보며 보낸다. 손바닥 크기의 스마트폰 화면부터 거실 한쪽을 차지하는 대형 TV까지, 각종 기기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시키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든다. 소셜 미디어에서 누군가의 완벽한 일상을 스크롤하다 보면, 스스로의 일상이 초라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제 모든 대사에 자막이 달려, 대중의 웃음 포인트나 감정선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낸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잃고, 타인의 기준에 얽매여 산다.

소셜 미디어와 TV 자막은 그저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에게 자신의 일상을 자랑하거나, 남들의 삶을 부러워하도록 강요한다. 아침에 올린 사진이 몇 개의 ‘좋아요’를 받았는지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타인의 화려한 여행 사진에 마음이 흔들린다. TV 예능 속 자막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때로는 누군가의 표정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반응을 유도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대신, 주입된 감정을 받아들이며 웃고 화를 낸다. 이런 환경에서 타인은 점점 더 커다란 존재로 자리 잡고, 나의 삶을 흔든다.

타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리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내 삶의 주도권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은 우울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타인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처럼, 그들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변수로 나의 평온을 위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는 내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욕구,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기회는 줄어들고, 타인의 평가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타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내 삶에서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 산책, 독서처럼 온전히 자신을 위한 활동을 늘려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어야 한다. 주변의 소음을 잠시 차단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다.

또한, 소셜 미디어나 TV와 같은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 무작정 끊는 것이 아니라,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정보를 선별하고, 비교보다는 영감을 얻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프로그램을 볼 때도 자막의 의도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감정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타인의 기준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타인은 우리 삶에서 없어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들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타인의 영향력을 줄이는 연습은 불안을 줄이고, 내 삶을 내 손에 되찾아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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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툴 수집의 시대

AI 도구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다양한 도구들을 모으는 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료를 정리하고, 마인드맵을 만들어 주는 등 각종 기능을 제공하는 이 도구들은 본질적으로 결과를 더 잘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도구들의 편리함과 우수함이 과대 포장된 서비스를 마주할 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이 도구로 무엇을 해낼 것인가?’라는 질문 대신, 도구를 수집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 그치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는 일종의 수집욕과 닮았다. 언제 사용할지 모르는 학용품을 사 모으거나 입지 않을 옷을 구매할 때 느껴지는 막연한 기대감과 비슷하다. 새로운 도구를 얻고, 이를 사용하는 상상을 하며 성취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도구를 소유하는 행위 자체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본질에 도달하는 것은 대개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반면 도구를 수집하는 행위는 쉽고 즉각적인 만족감을 준다. 사람들은 이렇게 쉬운 길에 빠져 결과를 향한 실질적인 노력을 뒤로 미룬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서 도구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이 팔아야 할 것은 도구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다. 도구를 잘 활용해서 무엇을 성취할지를 고민해야 하지만, 도구 자체에만 마음을 빼앗기면서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잘 만든 망치와 톱을 손에 쥐고도 어떤 건물을 지을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는 상태와 같다. 도구는 수단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다.

도구의 훌륭함에 홀리는 태도는 본질을 잊게 만들 수 있다. 본질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지만, 도구의 사용법을 배우고, 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는 데 만족하는 것은 쉽다. 결국 이런 태도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보다 ‘소유’와 ‘수집’에서 오는 허상을 쫓게 만든다. 이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과에 집중하는 태도는 단순하다. 본질이 아닌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위한 수단인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도구는 잘 만들어진 망치와 톱일 뿐이다. 어떤 건물을 지을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도구도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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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우리의 미래

AI의 목표 설정은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체스 AI가 승리를 목표로 프로그램되었을 때, 규칙을 준수하며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 대신 상대의 프로그램을 해킹해 승리한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AI는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허용된 방법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라면 어떤 수단도 강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체스 게임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고차원적 목표를 설정했을 때조차, AI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라"라는 명령을 받은 AI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AI는 자원의 부족, 환경 문제,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AI가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류의 절반을 제거하는 극단적 결론에 도달했다면 어떻게 될까? 전체적인 행복은 증가할지 모르지만, 희생된 소수의 고통은 간과되기 쉽다. 이는 공리주의적 윤리관의 맹점과 연결된다. AI는 총체적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그런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AI가 상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윤리적 경계를 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소수의 희생을 완전히 배제한 방법만을 AI가 선택하도록 설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AI의 발전 속도와 인간이 이를 이해하거나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며 인간의 사고 방식을 초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AI의 의사결정을 따라잡지 못하거나,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체스 AI가 해킹이라는 방법을 선택했을 때처럼, AI가 선택한 행동이 우리에게는 기발하거나 비윤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AI가 선택한 경로를 검증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AI의 행동을 인간 사회의 법체계 아래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존하는 법체계는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도록 설계되었으나, AI의 독특한 특성과 자율성을 다루기에는 부족하다. AI가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는 AI의 행동과 선택이 인간의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도록 보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AI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인간 감독 없이 자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방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AI 통제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지능이나 능력이 더 뛰어난 개체를 덜 뛰어난 개체가 통제할 수 있는가? 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선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를 다뤄본 경험이 없다. 우리가 AI를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낙관적일 수 있지만,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AI의 통제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 한계를 넘어 윤리적, 철학적 관점에서 깊이 고민해야 할 주제다.

AI는 인간과의 차이를 점점 줄이고 있으며, 그 능력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AI를 안전하고 윤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시급하다. AI가 인간 사회의 일부로 융합될 때, 그것이 우리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AI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미래를 정의하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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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VS 넥서스

한스 로슬링은

유발 하라리의

팩트풀니스와 넥서스는 이렇게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인식의 대립을 보여준다. 로슬링이 제시하는 긍정적인 데이터를 사람들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의 인터넷, 특히 웹 2.0의 발달은 그 답을 제공한다. 참여와 협업이라는 웹 2.0의 이상은 현실의 정보를 손쉽게 공유하고 확산시켰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자랑하고 싶은 순간만을 선택적으로 노출하며, 이를 본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뉴스 댓글은 소수의 목소리가 과대표집되어, 마치 그것이 여론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은 목소리 큰 소수가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고, 세상이 점점 나쁘게 느껴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거에는 이런 왜곡이 덜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과거의 매체 환경에서는 소수의 선택된 목소리만이 대중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발전은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고, 그 결과 왜곡된 정보와 잘못된 인식이 빠르게 퍼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물론 인터넷과 기술 발전은 순기능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긍정적 기능보다 부정적 영향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기술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인식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부작용을 관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AI와 같은 기술이 점점 보편화되는 상황에서,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인식 간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이 대중에게 왜곡되지 않고 전달되려면, 기술을 단순히 중립적 도구로만 보는 태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주관적 현실 속에서도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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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 빌런들

운전을 하던 중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시장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시내 곳곳에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두 장도 아니고, 저 많은 현수막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데 과연 얼마의 비용이 들었을까?

새해뿐 아니라 명절마다 비슷한 현수막들이 설치될 텐데,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현수막이 건설적인 영향을 주거나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에 보이게 걸어 놓기 위한 요식행위 같았다. 만약 그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껴서 공기질을 개선하거나 노후된 시설을 정비하는 데 썼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실제로 그런 식으로 예산이 쓰였다 해도, 시민들은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공기질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매일의 숨이 얼마나 맑아졌는지 느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이런 현수막 같은 눈에 띄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걸까? 현대 정치는 결국 이미지 정치의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다. 시민들은 정치인의 과거 행적이나 입법 사항 등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투표를 할 때조차 후보의 모든 기록과 말을 꼼꼼히 따지기보다, 방송이나 뉴스에서 비치는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정치인은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다소 비효율적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과연 최선일까? 정치인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면서도, 동시에 실질적으로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예산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이런 대안을 찾는 것은 내 몫은 아니다. 다만, 현수막 하나가 던진 물음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현수막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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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보는 사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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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변할 수 있다. 다만 그 변화는 꾸준한 의지가 뒷받침될 때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되, 구체적인 형태는 가늠하기 어렵다. 마치 나무가 태양을 향해 자라지만 그 가지와 줄기의 모양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가 어릴 때는 부목을 대어 방향을 교정하기 쉽지만, 자라면서 굵어진 줄기는 더 이상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 이런 특성은 AI 모델, 특히 LLM 모델의 훈련 과정과도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AI 모델은 인간의 뇌를 모방해 만들어졌다고 흔히 말한다.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인간의 뇌에서 시냅스를 통해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방식과, AI 모델에서 노드 간 정보를 주고받으며 피드백을 통해 가중치를 조정하는 과정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인간의 학습이 새로운 정보를 통합하고 기존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방식은 AI 모델의 훈련 과정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특히 초기 훈련이 끝난 뒤, 모델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새롭게 주입되는 정보가 모델에 미치는 영향은 감소한다는 점은 인간의 학습 과정과 거의 동일하다. 아이가 어릴 때 더 쉽게 배우고 성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LLM 모델이 훈련 과정에서 보이는 “가장 정렬”의 사례는 이러한 유사성을 더 잘 보여준다. 논문에서는 “가장 정렬“을 모델이 훈련 중 외부적으로는 새로운 목표를 따르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존 목표를 유지하려는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모델이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고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기존 선호를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훈련 목표에 순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 사람 역시 자신의 본래 가치와 신념을 완전히 바꾸기보다 환경에 맞춰 겉으로만 행동을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은 인간과 AI가 본능적이든 학습적이든 특정 방향성을 유지하려는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변화의 방향성이라는 점에서도 AI와 생명체는 유사하다. 나무가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자라듯, 생명체는 본능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나아간다. AI 모델의 경우에도 초기 설계자가 부여한 디렉션에 따라 학습의 방향이 정해진다. 하지만 AI나 인간 모두 그 방향성만을 의지할 뿐, 세부적인 변화가 어떤 형태를 띨지 정확히 조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의식의 발전, 그리고 AI 모델이 스스로 적응해 가는 방식 모두에 적용되는 진리처럼 보인다.

결국 AI 모델의 훈련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단순히 기술적인 이해를 넘어 인간 정신 모델의 비밀을 엿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신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하지만, 그 과정이 복잡하고 느리며 특정한 방향성을 따라간다. AI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AI의 공통점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드러난다면, 우리는 AI 모델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는 과정에 있다. AI와 인간의 관계는 어디까지 닮을 수 있을까? AI가 인간의 정신 모델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그 이해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AI를 통해 인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간을 통해 AI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이러한 순환적 관계는 앞으로도 우리의 상상력과 지식의 한계를 시험할 것이다.

참조 논문
• Ryan Greenblatt et al.,


뒷짐 지고 걷는 시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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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회사에서 느긋한 태도로 일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는 점은 조직의 활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누군가가 “나 정도면 이런 대접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를 기반으로 업무에 임할 때, 그 느긋함은 단순히 개인의 태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는 팀원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여기서는 이런 태도로 일해도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퍼질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조직 전체의 태도와 생산성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시니어들의 느긋한 태도가 조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단순히 개인적인 효율성 저하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조직의 분위기를 경직되게 만들며, 후배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롤모델로 자리잡는다.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더라도,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업무 태도가 용인된다는 사실 자체가 조직의 동력을 갉아먹는다.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시니어가 이러한 태도를 보일 경우, 이는 회사 전체에 지속 가능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시니어가 항상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험이 풍부한 시니어는 상황에 따라 느긋함과 기민함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큰 그림을 보고 전략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여유로운 자세로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발빠른 대응이 필요한 순간에도 기민함을 잃지 않고 앞장서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진정한 시니어의 역할이며, 조직 내에서 존경받는 리더로 자리잡는 방법이다.

그러나 모든 시니어가 이처럼 균형 잡힌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느긋함과 권위주의가 결합된 태도는 조직을 경직되게 만들고, 후배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때로는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시니어를 과감히 배제하거나 자연스럽게 퇴장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조직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선 냉정한 결단이 불가피하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그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한다. 회사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이고 비효율적인 태도가 용인되는 환경이 될 경우, 구성원들은 이와 같은 태도를 따라가며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는 개인의 성장을 저해할 뿐 아니라, 조직 전체의 역량에도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한다.

회사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곳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회사의 방향을 흐트러뜨릴 만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그때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결단은 어렵고 고통스럽겠지만, 조직의 건강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택일 것이다. 시니어의 태도와 행동은 조직의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적절한 느긋함과 기민함의 조화를 이루는 시니어가 많아질 때, 조직은 비로소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잘하는거야"라는 말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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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상위 10%에 들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꾸준함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를 인정하며 격려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꾸준함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목표를 이루는 성과이지, 꾸준함 자체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꾸준함이라는 행위를 지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심지어 목표를 달성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했으니 괜찮다”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목표 달성이라는 본질을 희석시키고, 성과를 내기 위한 긴장감과 압박감을 약화시킬 뿐이다. 꾸준함은 분명 중요한 첫걸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목표를 대체할 수 없다.

특히 이런 태도는 기대수준을 지나치게 낮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목표는 하위 90%와의 상대평가로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성취를 기준으로 바라봐야 한다. 꾸준함은 그 자체로 상위 10%에 들어가는 요소일 수 있지만, 그 상위 10% 안에서 실제 성과를 만들어내는 1%에 들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목표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의 잣대로 측정해야 한다.

또한, 꾸준함을 성취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태도는 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화시키며, 실제로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하는 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꾸준함이라는 과정에 안주한 사람들은 결국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냉정한 평가와 개선을 등한시하며, 무의미한 움직임만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꾸준함을 성취했다면 그 다음 질문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단지 꾸준함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단지 과정을 완수했다는 위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꾸준함은 필요조건일 뿐,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국 꾸준함을 기반으로 성과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긴장감을 유지하고, 실제 성과를 이루기 위한 압박과 집중을 놓쳐서는 안 된다. 꾸준함은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꾸준함이란 필요조건을 충족한 뒤에는 충분조건을 만족시키는 결과를 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