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불행

누군가의 낙원은 누군가의 지옥 위에 세워졌음을. 행복을 기대하며 시작한 장소는 불행한 기억을 가진 장소로.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난 곳은 새로운 불행이 시작되는 곳으로. 더 불행해지게 더 불행해지게.


불행한 삶

53평의 번듯한 집과 번쩍이는 플래그십 세단과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과 최고급 카메라와 렌즈들. 예전이라면 엄두도 못냈을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보다 점점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꽁냥거리며 15평의 오피스텔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신혼부부의 설렘이 좋다. 지나가는 외제차를 보며 언젠가는 나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사진을 찍으러 걸어다니던 그 때가 좋았다. 더 가질수록 행복하지 않지만, 이제 와서 덜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아닐테니까.


내로남불에 대해서

인간의 오랜 본성인 내로남불은 옛속담에서도 볼 수 있다. 완전하게 동일한 뜻은 아니겠지만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을 보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빽빽하게 무덤들이 줄지어 있는 공동묘지가 떠오른다. 그 많은 무덤 중에서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한 이상한 일들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나의 가장 치명적인 실패조차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남의 행동에 대해서는 서릿장 같은 잣대를 적용한다. 원칙적으로 잘못된 일이고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어줍짢은 사과는 사과문의 형식에 맞지 않는 변명일 뿐이다. 사과를 하려면 사과만 해야지 이유를 늘어놓는 것은 사과문을 가장한 변명문이라고 생각하며, 대중들은 '순수한'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각각의 무덤에도 핑계가 있다. 핑계는 곧 서사다. 결과로 봤을 때는 하찮기만 한 죽음, 심지어 악인의 죽음에조차 서사가 있다. 인간은 애초에 내로남불 하게 이기적으로 생겨먹었지만 서사를 통해서 공감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로남불은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감이고,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게 되고 심지어 악인의 행적에도 불쌍하게 여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범죄자에게 서사를 입히지 말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범죄자에게는 공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내로남불의 태도로 그들을 단죄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내로남불과 공감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부모에서 나온 쌍둥이 같은 것이다. 그들의 사정을 모를 때 나는 나의 잣대로 나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감정이입이 되고 같은 편이라는 느낌이 든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같이 고생하고 회식을 하며 흘러왔던 서사는 그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 준다. '이웃의 신발을 신고 한참을 걸어보기 전에는 그들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고 한다. 결국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우리편 상대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많이 공유한 사람이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