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 정책의 아이러니

제품 보증 정책은 언제나 아이러니를 동반한다. 일반적으로 전자제품은 1년 또는 2년 보증을 제공한다. 그러나 고장이 날 확률은 초기 불량 문제가 아닌 이상 보통 1~2년 안에는 낮다. 이 시기는 제품의 안정성이 비교적 보장되는 “가장 쉬운 시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 제품의 내구성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르는 3년 차 이후에 고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때는 제조사의 보증 범위를 벗어나, 수리의 책임이 온전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보증 기간의 설계는 결국 “이 제품은 2년까지만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만약 소비자가 3년 차에 고장을 경험한다면, “이 제품은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결과적으로 보증은 초기의 안정성을 강조하며, 제품의 약점을 가리는 역할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 구조적인 아이러니는 조리원 시스템에서도 반복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보통 생후 3주 동안 조리원에서 지낸다. 이 기간 동안 조리원은 신생아와 산모를 돌보며 중요한 지원을 제공한다. 그러나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생후 3주는 신생아가 거의 잠만 자는 시기로, 상대적으로 돌보기 쉬운 편이라는 것을. 진짜 힘든 시기는 3주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조리원은 이 “쉽고 안정적인 시기”만을 지원하고, 가장 힘든 시기가 시작되면 산모와 가족을 떠나보낸다. 초기의 생색만 내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도움의 손길을 거두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사용자나 소비자를 중심에 두지 않고, 기업이나 서비스 제공자의 편의에 초점을 맞춘 결과물이다. 보증과 지원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놓친다면, 이는 결국 신뢰를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보증과 지원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기간 내 제공”이 아니라, 고객이 진짜로 어려움을 겪는 순간에 함께하는 데 있다.


진화와 혁신 - 자연과 기술이 보여주는 패턴

생명의 진화는 초기의 느린 발전에서 복잡성을 획득한 뒤 급격히 가속화되었다. 이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에서도 볼 수 있는 패턴과 놀랍도록 닮았다. 단순한 기초 단계에서 출발하여 복잡한 라이브러리와 도구들이 등장하면서 빠른 혁신이 가능해지는 과정을 통해 자연과 기술의 공통된 원리를 엿볼 수 있다.

지구상에 생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약 38억 년 전으로, 초기에는 단순한 단세포 생물들이 화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 시기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형성되는 데 걸린 긴 시간을 반영하며, 생명의 기본 구조가 안정화되기까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포막, DNA, 에너지 전환 시스템 같은 핵심 구조를 확보한 뒤, 생명체는 놀라운 속도로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약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바로 그 정점이었다.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들이 대거 출현하며 생물 다양성의 시대를 열었다.

이 과정은 컴퓨터 과학에서의 발전과도 유사하다. 초기에는 하드웨어 설계와 기본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에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라이브러리, 프레임워크, API 같은 재사용 가능한 도구들이 등장하면서 프로그램 개발은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 나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 기술의 조합과 재구성을 통해 혁신이 가속화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발전이 종종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술의 충격”이라는 책은 기술 혁신이 특정한 지식 기반에서 기인하며, 비슷한 기술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생한 사례를 제시한다. 이는 생명체의 진화와도 유사하다. 진화론에서 특정 환경적 압력 아래에서 서로 다른 지역의 생명체가 비슷한 적응 형태를 독립적으로 보여주는 수렴 진화와 맥을 같이 한다.

복잡한 시스템이 발전을 이끄는 이유는 명확하다. 재사용 가능한 구성 요소는 다음 단계를 구축하는 기반이 된다. 생명체의 경우, DNA 복제 메커니즘은 새로운 유전적 조합을 실험할 기회를 제공했고, 프로그램 개발에서는 라이브러리가 동일한 코드의 반복을 줄여주며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이는 모두 안정적 기반 위에서 누적된 복잡성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원리를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점은 발전 과정에서의 피드백 루프다. 생명체는 진화의 압력 아래에서 점점 더 적응력이 강한 방향으로 발전했고, 소프트웨어는 사용자 피드백과 개발자 협업을 통해 더욱 정교해졌다. 이와 동시에, 기술 혁신은 특정 시대의 지식과 자원이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생명의 진화와 기술의 발전은 복잡성을 다루는 인간과 자연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사용 가능성을 극대화할 때 혁신은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런 원리는 우리가 다음 단계의 도전을 마주할 때도 유효하며, 인류가 앞으로 더 나아갈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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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장에 집중하기

비즈니스 결과는 항상 내가 잘하거나 못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내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우연히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복잡한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를 기준으로 나 자신을 평가하기보다는, 자기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잘했음에도 비즈니스 결과가 좋지 않은 상황은 생각보다 받아들이기 쉽다. 결과가 외부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잘하지 못했는데도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는 오히려 자기효능감이 떨어지곤 한다. 이는 성공을 스스로의 능력과 연결 짓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비즈니스 결과와 관계없이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잘했을 때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내가 못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와도 일관되게 나를 유지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준다.

지속적인 성장은 비즈니스 성공 확률도 높인다. 비즈니스의 결과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지만, 내가 잘하는 것이 성공의 필요조건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잘했을 때 비즈니스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잘하지 못한다면 성공의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결국, 개인의 성장은 직접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비즈니스 전반의 가능성을 넓히는 밑바탕이 된다.

특히 오늘날에는 GPT와 같은 도구들이 개인의 성장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필요한 것을 개발하거나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이 거의 사라진 시대다. 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시도하고 학습하며, 비즈니스와 연결 지을 수 있는 기회가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AI 관련 기술을 탐구하거나 벡터 검색 같은 프로토타입을 직접 개발하면서, 실제 업무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통찰을 얻게 된다. 이러한 성장의 과정은 단순히 결과를 얻는 것을 넘어, 나의 도구와 능력을 쌓아가는 경험이 된다.

결과가 나의 노력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비즈니스 환경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자기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가질 때, 결과와 상관없이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단기적인 실패에도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인 성공을 준비하게 해준다. 내가 성장하면 결과는 따라오거나, 혹은 따라오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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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대기업 그룹처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대기업 그룹의 운영 방식과 닮아 있다. 시장에서 가장 인정받는 회사 일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을 카메라, 책, 그리고 컴퓨터 업그레이드 같은 활동에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선 삶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대기업 그룹이 수익성이 높은 계열사를 통해 번 돈으로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며 전체적인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듯, 나 또한 잘하는 일을 통해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좋아하는 활동에 투자하며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잘하거나 좋아하는 일이 반드시 돈을 벌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촬영이나 독서처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이 정신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경제적 보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시장에서 인정받는 일에서 성과를 내며, 번 돈을 나만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내 삶을 유지하는 중요한 구조가 된다.

회사의 성취는 내 능력을 입증하고 보람을 느끼게 한다. 사진은 정신적인 힐링을, 독서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을 준다. 컴퓨터 업그레이드는 생산성을 높이며 도구로서의 가치를 더한다. 이 모든 활동은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기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중심을 둔다.

특히 사진을 찍으며 느끼는 힐링이나 독서를 통한 상상의 여행은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을 덜어준다.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끌리는 활동을 선택하며, 계절의 변화나 특별한 날에 의미를 부여하듯,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새롭게 만들어 간다.

삶은 최종 목표를 향해 가는 직선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풍요로움 속에 의미가 있다. 대기업 그룹이 다각화된 구조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성장을 도모하듯, 나 또한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적절히 배합해 나가며 내 삶이라는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 방식은 나에게 성취와 만족을 동시에 안겨주며,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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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생기면 책임지실거에요?

“그런 일이 생기면 책임지실거에요?“라는 말은 어쩌면 너무 익숙하다. 우리는 종종 이 말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책임을 묻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나는 그 일을 절대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심리가 반영된 표현이다. 문제는 이 태도가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조직의 발전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이 말이 가지는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작은 리스크를 침소봉대하는 심리다.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근거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미래에 다가올 잠재적 기회를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다. 불확실성은 인간이 마주해야 할 기본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과도하게 확대해 해석함으로써, 가능성과 도전을 스스로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다. 새로운 일을 시도했을 때 예상치 못한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공포는 인간의 기본적인 방어 기제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고, 결국 정체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조직에서 도전을 두려워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그 조직은 발전보다는 정체와 퇴보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말로 일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표현 대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먼저 진행해 보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아 보시죠.” 이 한마디에는 책임 회피가 아니라 도전 의식이 담겨 있다.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은 문제를 핑계로 행동을 거부하기보다는, 일단 시도한 후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태도가 훨씬 더 생산적이다.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책임을 두려워하기보다 성과와 해결을 목표로 삼는다.

정작 발생하지도 않은 일을 근거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면서 실패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고, 실패 후에는 대처하고 배우는 과정이다.

결국, “그런 일이 생기면 책임지실거에요?“라는 말은 거부와 두려움을 표현하는 문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은 기억해야 한다. 정체된 삶과 조직은 위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험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는 행동일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행동하고, 책임을 질 각오로 나아갈 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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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지옥이다

우리는 하루의 상당 시간을 화면을 바라보며 보낸다. 손바닥 크기의 스마트폰 화면부터 거실 한쪽을 차지하는 대형 TV까지, 각종 기기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시키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든다. 소셜 미디어에서 누군가의 완벽한 일상을 스크롤하다 보면, 스스로의 일상이 초라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제 모든 대사에 자막이 달려, 대중의 웃음 포인트나 감정선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낸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잃고, 타인의 기준에 얽매여 산다.

소셜 미디어와 TV 자막은 그저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에게 자신의 일상을 자랑하거나, 남들의 삶을 부러워하도록 강요한다. 아침에 올린 사진이 몇 개의 ‘좋아요’를 받았는지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타인의 화려한 여행 사진에 마음이 흔들린다. TV 예능 속 자막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때로는 누군가의 표정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반응을 유도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대신, 주입된 감정을 받아들이며 웃고 화를 낸다. 이런 환경에서 타인은 점점 더 커다란 존재로 자리 잡고, 나의 삶을 흔든다.

타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리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내 삶의 주도권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은 우울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타인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처럼, 그들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변수로 나의 평온을 위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는 내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욕구,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기회는 줄어들고, 타인의 평가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타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내 삶에서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 산책, 독서처럼 온전히 자신을 위한 활동을 늘려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어야 한다. 주변의 소음을 잠시 차단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다.

또한, 소셜 미디어나 TV와 같은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 무작정 끊는 것이 아니라,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정보를 선별하고, 비교보다는 영감을 얻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프로그램을 볼 때도 자막의 의도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감정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타인의 기준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타인은 우리 삶에서 없어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들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타인의 영향력을 줄이는 연습은 불안을 줄이고, 내 삶을 내 손에 되찾아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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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툴 수집의 시대

AI 도구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다양한 도구들을 모으는 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료를 정리하고, 마인드맵을 만들어 주는 등 각종 기능을 제공하는 이 도구들은 본질적으로 결과를 더 잘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도구들의 편리함과 우수함이 과대 포장된 서비스를 마주할 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이 도구로 무엇을 해낼 것인가?’라는 질문 대신, 도구를 수집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 그치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는 일종의 수집욕과 닮았다. 언제 사용할지 모르는 학용품을 사 모으거나 입지 않을 옷을 구매할 때 느껴지는 막연한 기대감과 비슷하다. 새로운 도구를 얻고, 이를 사용하는 상상을 하며 성취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도구를 소유하는 행위 자체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본질에 도달하는 것은 대개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반면 도구를 수집하는 행위는 쉽고 즉각적인 만족감을 준다. 사람들은 이렇게 쉬운 길에 빠져 결과를 향한 실질적인 노력을 뒤로 미룬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서 도구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이 팔아야 할 것은 도구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다. 도구를 잘 활용해서 무엇을 성취할지를 고민해야 하지만, 도구 자체에만 마음을 빼앗기면서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잘 만든 망치와 톱을 손에 쥐고도 어떤 건물을 지을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는 상태와 같다. 도구는 수단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다.

도구의 훌륭함에 홀리는 태도는 본질을 잊게 만들 수 있다. 본질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지만, 도구의 사용법을 배우고, 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는 데 만족하는 것은 쉽다. 결국 이런 태도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보다 ‘소유’와 ‘수집’에서 오는 허상을 쫓게 만든다. 이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과에 집중하는 태도는 단순하다. 본질이 아닌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위한 수단인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도구는 잘 만들어진 망치와 톱일 뿐이다. 어떤 건물을 지을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도구도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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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우리의 미래

AI의 목표 설정은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체스 AI가 승리를 목표로 프로그램되었을 때, 규칙을 준수하며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 대신 상대의 프로그램을 해킹해 승리한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AI는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허용된 방법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라면 어떤 수단도 강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체스 게임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고차원적 목표를 설정했을 때조차, AI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라"라는 명령을 받은 AI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AI는 자원의 부족, 환경 문제,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AI가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류의 절반을 제거하는 극단적 결론에 도달했다면 어떻게 될까? 전체적인 행복은 증가할지 모르지만, 희생된 소수의 고통은 간과되기 쉽다. 이는 공리주의적 윤리관의 맹점과 연결된다. AI는 총체적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그런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AI가 상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윤리적 경계를 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소수의 희생을 완전히 배제한 방법만을 AI가 선택하도록 설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AI의 발전 속도와 인간이 이를 이해하거나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며 인간의 사고 방식을 초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AI의 의사결정을 따라잡지 못하거나,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체스 AI가 해킹이라는 방법을 선택했을 때처럼, AI가 선택한 행동이 우리에게는 기발하거나 비윤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AI가 선택한 경로를 검증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AI의 행동을 인간 사회의 법체계 아래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존하는 법체계는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도록 설계되었으나, AI의 독특한 특성과 자율성을 다루기에는 부족하다. AI가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는 AI의 행동과 선택이 인간의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도록 보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AI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인간 감독 없이 자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방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AI 통제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지능이나 능력이 더 뛰어난 개체를 덜 뛰어난 개체가 통제할 수 있는가? 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선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를 다뤄본 경험이 없다. 우리가 AI를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낙관적일 수 있지만,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AI의 통제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 한계를 넘어 윤리적, 철학적 관점에서 깊이 고민해야 할 주제다.

AI는 인간과의 차이를 점점 줄이고 있으며, 그 능력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AI를 안전하고 윤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시급하다. AI가 인간 사회의 일부로 융합될 때, 그것이 우리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AI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미래를 정의하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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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VS 넥서스

한스 로슬링은

유발 하라리의

팩트풀니스와 넥서스는 이렇게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인식의 대립을 보여준다. 로슬링이 제시하는 긍정적인 데이터를 사람들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의 인터넷, 특히 웹 2.0의 발달은 그 답을 제공한다. 참여와 협업이라는 웹 2.0의 이상은 현실의 정보를 손쉽게 공유하고 확산시켰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자랑하고 싶은 순간만을 선택적으로 노출하며, 이를 본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뉴스 댓글은 소수의 목소리가 과대표집되어, 마치 그것이 여론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은 목소리 큰 소수가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고, 세상이 점점 나쁘게 느껴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거에는 이런 왜곡이 덜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과거의 매체 환경에서는 소수의 선택된 목소리만이 대중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발전은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고, 그 결과 왜곡된 정보와 잘못된 인식이 빠르게 퍼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물론 인터넷과 기술 발전은 순기능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긍정적 기능보다 부정적 영향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기술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인식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부작용을 관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AI와 같은 기술이 점점 보편화되는 상황에서,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인식 간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이 대중에게 왜곡되지 않고 전달되려면, 기술을 단순히 중립적 도구로만 보는 태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주관적 현실 속에서도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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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 빌런들

운전을 하던 중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시장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시내 곳곳에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두 장도 아니고, 저 많은 현수막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데 과연 얼마의 비용이 들었을까?

새해뿐 아니라 명절마다 비슷한 현수막들이 설치될 텐데,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현수막이 건설적인 영향을 주거나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에 보이게 걸어 놓기 위한 요식행위 같았다. 만약 그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껴서 공기질을 개선하거나 노후된 시설을 정비하는 데 썼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실제로 그런 식으로 예산이 쓰였다 해도, 시민들은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공기질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매일의 숨이 얼마나 맑아졌는지 느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이런 현수막 같은 눈에 띄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걸까? 현대 정치는 결국 이미지 정치의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다. 시민들은 정치인의 과거 행적이나 입법 사항 등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투표를 할 때조차 후보의 모든 기록과 말을 꼼꼼히 따지기보다, 방송이나 뉴스에서 비치는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정치인은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다소 비효율적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과연 최선일까? 정치인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면서도, 동시에 실질적으로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예산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이런 대안을 찾는 것은 내 몫은 아니다. 다만, 현수막 하나가 던진 물음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현수막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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