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카 M11 Monochrom 구매

꿈의 카메라라 불리는 라이카지만, 비싼 가격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품질(최신 디지털 제품 대비)이라는 생각에 사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찮게 흑백 촬영만 가능한 모노크롬 기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모노크롬이 컬러바디보다 더 비싸다는 것도 어이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흑백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터라 관심을 조금씩 가져가다가, 웹에서 M11 Monochrom의 원본 RAW 파일을 다운 받아서 보정을 한 번 해봤다. 컬러 어레이가 제거된 순수한 모노 이미지의 계조는 눈으로 보기에 확연히 뛰어났고, 보정 관용도도 끝내줬다. 결국 M11m은 나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단지 내 손에 들어온 시점이 예상보다 좀 더 빨랐을 뿐이다.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뷰옹이에게, "나 라이카 사도 돼?"라고 물었고, 뷰옹이는 두 말 않고 사라고 나를 오히려 백화점으로 잡아 끌었다. 카메라를 받자마자 해가 진 공원에서 테스트 샷을 날렸는데, 빛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놀라운 품질을 보여주었다. ISO 3200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노이즈도 없고 계조가 유지되는 이미지를 뽑아주었다. 나쁜 빛에 이런 막샷을 날렸는데 이 정도 결과라면, 좋은 빛이 있는 멋진 장면에서 찍으면 얼마나 대단할까 설렌다. 내 삶에 드디어 라이카를 손에 쥐게 되다니 아직도 잘 믿기지 않는다.


회장님 좌석

뒷좌석 문을 열 때만 아우디 마크가 나와서 운전자로서 아쉬움이 항상 많았는데, 드디어 뷰엉이 기사 덕분에 뒷좌석에 처음 앉아봤다. 운전만 할 때는 몰랐는데 뒷좌석에 드러누워 가니까 승차감이 너무 좋았다. 뒷좌석에 타 본 뷰엉이도 너무 만족해서 장거리를 갈 때는 뒷좌석에 번갈아 가면서 앉기로 합의를 봤다. 회장님이 된 느낌 나쁘지 않았어 ㅋㅋ


예의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

내가 예의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 평소보다 더 지나칠 만큼 예의를 갖추고 대한다는 것을 최근 깨닫게 되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자니, '내가 이 정도로 했는데도, 넌 예의가 그렇게나 없다고?' 하는 느낌 하나와, 상대의 예의없음과 나의 예의바람의 괴리를 최대한 넓혀 손절칠 명분을 만들어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라밍고

생각보다 재미있게 생긴 녀석


몰라도 될 권리

세상은 분명 과거보다 더 좋아지고 있지만, 인터넷의 무시무시한 전파력으로 인해 나쁜 일들이 멀리, 빠르게 퍼져나간다. 문제는 인간이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받고 감정이 증폭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사람들은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았지만, 출퇴근길에 스포츠 신문 한 부 보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툭 던져 놓으면, 그 이후로는 현실에서 살 수 있었단 말이지. 나쁜 일들이 소리소문 없이 묻힌 과거가 좋은걸까. 모든 일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다같이 스트레스를 받고, 하나의 타게팅 된 사건에 인터넷 조리돌림이 발생하는 지금이 좋은걸까. 과거부터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알아야 할 권리' 대신 '몰라도 될 권리'가 필요한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화물용 엘레베이터의 용도

지금 나는 화물 엘레베이터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다. 며칠 전에 HR 담당자가 새로 들어온 직원들과 사무실 투어를 하면서, 화물 엘레베이터 앞에서 서서 "이 엘레베이터의 용도는 무엇일까요?"하고 물었다. 정답은 큰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두는 장소였다. 하지만 매일 실사용 용도를 보는 나로서는, '담배 피러 갈 때 사용하는 엘레베이터요'라고 답을 하고 싶은걸 꾹 참느라 힘들었다.


공중도덕의 의미

어제는 혼자 설렁탕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잡았고, 이미 단 간식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별로 식욕이 없는 상태에서도 밥 같은 것을 먹고 싶어서 설렁탕을 먹었을 뿐이다. 저 멀리 대각선 건너편으로 행색이 초라한 12명 가량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이미 소주를 몇 병은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 중 2~3명은 한국말임에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그게 발음 때문이었는지 지나치게 크게 말해 울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끊임없이 좌중을 압도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커다란 웃음으로 보답했다. 밥을 한숟갈씩 뜨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해야 하는 것은 의무인가, 아니면 타인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인가. 설렁탕집은 공공장소인가 아닌가? 술을 파는 식당이라면 술집에서 허용할만한 소음을 내는 것은 문제가 없는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빠르게 설렁탕을 비우고 나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안에서 아이들이 지나치게 시끄럽게 떠들면, "너희들 혼자만 사는 집도 아닌데 좀 조용히 해주겠어?"라고 자제시킨다. 식당에서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거나 대화하면,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떠드는게 말이 돼?"라고 주의를 준다. 덕분에 아이들은 적당한 크기로 대화하고, 식당 같은 곳에서는 시끄럽게 굴지 않는다. 어제 내가 설렁탕 집에서 만난 그 무리들은 가정 교육을 못 받은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시끄러운 사람은 주위에 피해를 준다. 공공장소에서 조용한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하지만 시끄러운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받는다. 약간은 불공정거래 같다는 느낌이 든다.

주말 오전 컴퓨터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거실에서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렸다. 주의를 시킬까 하다가 딜레마에 빠졌다. 나는 어제 설렁탕집에서 떠들던, 심지어 아이들의 소리보다 몇 배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그들에게는 왜 주의를 줄 수 없었을까? 그들에게 한 마디 하지도 못하던 내가 아이들에게 주의를 줘야 한다면 그건 어떤 명분 때문일까? 이런 질문을 하다가 그냥 아이들의 소리를 참아 보기로 마음 먹었다. 몇 분이나 참아질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성의 가치

우리가 인간성을 보존해야 할 당위적인 이유가 있을까? '인간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의 죽음은 세포의 생명이 다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고, 나의 몸부림은 우주적 차원에서 먼지만도 못한 사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기뻐하고 슬퍼하고 살아가는가? 그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 않으면 너무나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삶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런 삶을 잠시나마 사랑을 통해서 잊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성이란 것은 굳이 가지고 있어야 할 당위는 없지만, 행복하기 위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 같은 것이다.


동화책 표지

아이들 책 그림 중에 따라 그리고 싶은게 꽤 있다.


길에서

나는 뭔가 시작할 떄 책을 3~4권 이상 사는 편이다. 그 정도 보면 대충 감이 와서. Rebelle 7과 갤럭시북3 프로를 구매하고 재미있게 유화를 그리고 싶어서 유화책 3권과 수채화책 2권을 샀다. 뭔가 그림 그리는 재미가 더 늘어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