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필요한 시대가 온다

90년대의 직장 문화는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다. 정장 차림이 기본이었고, 상사의 말에 대꾸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도 점차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구성원 간 격의 없는 대화가 가능해졌고, 복장 역시 자유로워져 가벼운 복장으로 회사에 출근하거나 외부 미팅에 나서는 이들도 생겨났다. 형식과 제약을 탈피해 자율성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자유가 어느 순간 방종으로 이어지면서 직장 내 규율이 무너지고, 직책자의 권위까지 도전받는 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자유의 남용은 프로젝트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프로그램의 전체 관리자로서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필수적인 미팅을 요청했을 때도 특정 팀의 구성원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유를 들며 참석을 거부하는 일이 생겼다. 또한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한 미팅임에도 불구하고, 회의 내용이 미리 구체적으로 정리된 자료를 요구받기도 했다. 발산 단계에서의 아이디어를 제한하려는 이 같은 요구는 자칫 회의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프로젝트 관리자 입장에서는 비협조적인 태도와 정보 부재로 인해 전체 프로젝트의 진척이 어려워지며, 실패 확률마저 높아지는 것이다.
수평적인 분위기와 자유가 주는 장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직무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율과 책임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의견을 존중하되,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절차와 책임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젊은 직원들 중에는 수평적 문화를 추구하면서도 직장 내 규율의 중요성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유와 방종은 분명히 다르며, 수평적 문화 속에서도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규율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제 직장 내 문화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 있다. 예전의 보수적인 문화와 지나치게 자유로운 문화를 모두 경험한 끝에, 직장 내 원칙과 규율이 다시금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예의를 중시한다기보다, 회사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원칙과 규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같은 페이지를 유지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술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려면 효율적이고 명료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순히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을 넘어선다. 특히 상대와 내가 같은 이해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이를 위해 미팅 중에 자연스럽게 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 상대가 말한 내용을 내 말로 다시 한번 정리해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요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각자 머릿속 생각을 기반으로 대화하다 보니, 같은 말을 들어도 해석이 다를 수 있다. 패러프레이징을 통해 서로 동일한 이해를 하고 있는지 체크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이렇게 해야만 회의 말미에 가서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불필요한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논의의 흐름을 다시 되돌리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나는 패러프레이징을 통해 논의가 엇나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 한다.
이러한 습관은 회의를 효율적으로 만들고,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회의가 명료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중간마다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덕분에 나와 상대가 함께 논의의 궤도를 잘 유지할 수 있다. 다만, 때로는 상대가 이 방식을 부담스럽게 느낄 때도 있다. 특히 회의에서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방식을 조금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몇 번 함께 하다 보면, 대부분은 오히려 이 방식의 장점을 체감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상대방도 명확한 회의의 효과를 경험하게 되고, 내가 패러프레이징을 활용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는 듯하다.
패러프레이징은 복잡한 주제의 논의일수록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복잡한 논의는 한순간만 방심해도 주제가 빗나가거나 각자의 논의 방향이 달라지기 쉬운 만큼,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도움이 된다. 특히 대화의 중심을 잃지 않고 같은 방향을 유지하는 것은 논의와 문제 해결에 있어 커다란 장점이 된다. 따라서 대화를 주도하고 회의를 이끌어야 하는 매니저라면, 패러프레이징을 한 번쯤 시도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매니저 입장에서는 팀의 이해를 하나로 묶는 일이 중요한데, 패러프레이징을 통해 팀원들이 모두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은 팀워크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패러프레이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중립적인 관점에서 상대의 말을 그대로 요약해줄 때, 상대방도 공정하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 감정적 판단이 개입되면 상대방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논리적 관점에서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회의는 더욱 효율적으로 진행되고,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정에도 큰 도움이 된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은 상대와 나 사이의 이해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다. 패러프레이징은 그 간극을 줄여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유용한 도구로, 회의의 효율성을 높이고 업무 목표를 더욱 원활하게 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엘레베이터 관리의 책임자는?

최근 여러 분야에서 고객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접하게 된다. 플랫폼에서 상품을 주문했는데 배송이 지연될 경우, 고객센터에서 받는 답변은 보통 택배사로 직접 연락하라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고객이 처음 컨택한 창구에서는 단순히 책임을 외주사나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고객은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며 책임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인다. 이처럼 책임을 전가하고 본인들은 뒤로 빠지는 태도는 매우 무책임해 보인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물었는데 돌아온 답변이 현대엘리베이터였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외부 대행업체일 뿐 아파트 내 엘리베이터 관리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을 지는 곳은 아니다. 주민으로서 당연히 아파트 관리사무소 내에 있는 엘리베이터 담당자가 고객 응대의 첫 번째 책임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객이 아파트 담당자가 아닌 외부 업체를 찾아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면, 관리사무소가 하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외부 업체를 언급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이유는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에서 벗어나려는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고객 응대의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고, 고객이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내부 담당자를 안내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명확한 책임 소재가 설정되지 않으면 고객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은 물론이고 서비스 전체에 대한 신뢰도도 떨어진다. 더욱이 이런 문제는 매번 지적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가고, 언젠가부터는 당연한 업무 방식으로 자리잡아 버린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을 만나면 “현대엘리베이터는 외부 업체일 뿐이고, 관리사무소 내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분명히 요구한다.
서비스나 관리 조직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책임 소재가 투명하게 밝혀져야 하고, 고객이 처음 접촉한 창구에서부터 일관성 있는 응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관리 주체가 불분명하고 고객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야 하는 구조는 결국 그 조직에 대한 고객의 불신을 키울 뿐이다. 이는 단순히 특정 문제의 해결 여부를 떠나서, 서비스 전체의 책임감에 대한 신뢰와 직결된다.
고객이 누군가에게 ‘직접 지적’해야만 해결되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은 이미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서비스 제공자와 관리자가 고객에게 필요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고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한,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는 요원해 보일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는 관계 정리의 기술

과거 직장에서 만난 한 선배는 나를 볼 때마다 습관처럼 부정적인 말을 던졌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냐?” “오늘따라 얼굴이 안 좋다” 같은, 겉으로는 챙겨주는 것 같지만 결국 나를 평가절하하는 말들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흘려들었지만,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부정적 피드백은 나를 서서히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서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성장할 수 있지만, 이런 말은 에너지를 갉아먹고 나를 낮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런 경험은 ‘나의 약점만을 들추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직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유독 한 곳에서는 내가 하는 일마다 평가절하되는 경험을 했다. 열심히 노력해도 상사는 나의 성과보다는 부족한 점에만 주목했고, 그저 내가 문제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피드백을 통해 깨달은 것은 하나였다. 어느 한 사람이 나를 잘못 본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사람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장점을 인정해 줄 수 있는 환경이 얼마든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기 평가를 자꾸만 낮추는 환경에 머물며 소모적인 감정만 쌓기보다는,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결정이었다.
물론, 부정적 피드백이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개선할 점이 있을 때 이를 알리는 피드백은 필요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유 없이 계속 평가절하되고, 나의 장점은 무시당한 채 단점만 부각된다면 그 관계에 지나친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시선 속에 갇혀 있다 보면 결국 그 부정적인 인식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 하게 된다. 그래서 빠르게 거리를 두는 결단이 나에게 진정 맞는 자리로 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이후, 무리하게 부정적인 시선과 거리를 두기로 결심하면서 내 생활 역시 눈에 띄게 달라졌다. 불필요한 부정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들 속에 머물 때 정신 건강이 지켜지고, 내 일과 삶의 질이 훨씬 윤택해졌다. 단점을 굳이 끄집어내기보다는 서로의 장점을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더 많은 성과를 내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결국, 나를 평가절하하는 사람들 곁에 머물며 무의미한 감정 소모를 겪기보다는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의 성과를 결정짓는 두 개의 축

회사의 성장은 대표의 꿈과 상상력, 그리고 비전의 크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 말은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최대치가 대표의 그릇에 따라 정해진다는 의미와 같다. 대표가 품은 꿈과 목표가 클수록, 회사가 이룰 수 있는 최대치는 커지지만, 그 반대라면 회사는 그 한계를 넘기 어렵다. 회사의 실링을 정하는 것이 대표의 비전이라면, 이 실링을 얼마나 빠르게, 효율적으로 채워가느냐는 구성원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 구성원들이 가진 지식과 업무 수행 능력, 그리고 회사 내에서의 협업 역량 등이 대표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회사의 성공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대표가 그릇을 크게 넓히는 동시에, 역량 있는 구성원들이 빠르게 이 그릇을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모든 구성원이 목표에 공감하고 일치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목표를 완벽히 이해하더라도, 구성원들의 역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비전은 현실화될 수 없다. 결국 회사가 최고 속도로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려면 대표와 구성원이 동시에 발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구성원의 역량을 높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실력 있는 인재를 끌어들이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으며, 이들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역량 있는 인재들이 많아질수록 회사 전체의 역량은 자연스럽게 상향 평준화된다. 이러한 평준화의 효과는 단순히 개개인의 성장을 넘어서 구성원들이 주위의 수준에 맞춰 상호간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를 마이클 조던과 함께 뛰며 특급 선수로 성장했던 스코티 피펜이나 론 하퍼와 같은 예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하거나 약간의 재능을 가졌던 선수들이 전설적인 선수와 함께하면서 상향된 기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처럼, 주위의 수준이 높을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끌어올려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향 평준화를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다. 대표의 노력과 각 구성원의 성장이 겹쳐져야만 발생할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비전이 클수록, 그리고 이를 실현할 인재들이 많을수록 회사는 높은 목표를 더욱 빠르고 탄탄하게 이루어갈 수 있다.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고?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라는 말은 언뜻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상 실속 없는 주장이자 비현실적인 사고에 가깝다. 회사와 직원이 생각하는 ‘월급 받은 만큼’의 기준이 다르고, 애초에 이를 정량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는 보통 월급을 성과와 목표 달성의 기대치로 본다면, 직원은 그저 시간의 대가로 여길 수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월급만큼’이라는 기준에는 합의점을 찾기 어렵다. 결국 이 말은 실질적인 성과나 의욕과는 무관하게, 근무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겠다는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
이런 태도는 일하는 방식을 시간으로만 평가하게 만들며, 그 결과 회사는 직원들이 실제로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보다는 그들의 출퇴근 시간을 감시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시간만을 평가하는 방식은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열심히 일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핑계가, 반대로 능동적으로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의욕을 꺾는 족쇄가 된다. ‘출근해서 몇 시간 앉아 있었는가’만을 중시하는 빡빡한 문화 속에서 자율성과 열정을 가진 직원들은 숨이 막히기 마련이다. 결국 자발성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싶은 이들은 회사를 떠날 기회를 찾게 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월급 받은 만큼만”이라는 태도로 일하는 체리 피커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무조건 성과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비즈니스 환경이 경쟁적이고 어려운 만큼, 최선을 다해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회사는 성과보다 통제가 쉬운 근태 관리에 의존하게 되고,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지표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근태와 성과는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회사가 ‘통제 가능한’ 영역이라는 이유만으로 근태 감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결국 자율성과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무거운 조직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이런 방식이 지속되면 직원들은 점점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바뀌게 된다. 무겁고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자율적으로 일할 수 없다고 느낀 뛰어난 인재들은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되고,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사람들만 남는다. 성과보다는 근태에만 의존하는 악순환 속에서 회사는 활력을 잃고 점점 정체된 조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기업의 목표 달성은 왜 이리 어려울까?

나는 사진을 찍을 때 가끔 사진 대가들의 작품을 찾아본다. 그들의 구도와 톤에 영향을 받으면, 내 사진도 더 멋지게 찍히고 보정에도 한층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한동안 대가들의 작품을 보지 않으면, 점점 예전 습관이 나와 내 사진의 임팩트가 줄어든다. 이런 경험을 할 때면, 기업에서 목표를 관리하는 일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목표를 설정하고도 이를 꾸준히 돌아보고 관리하지 않으면 목표의 본질은 희미해지고, 어느새 원래의 관성에 따라 가던 길로 돌아가기 쉽다.
기업들이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들이지만,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원인은 목표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관리의 부재에 있는 경우가 많다. 목표는 적절하게 수립되었더라도 이를 구성원에게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지, 목표 달성을 어떻게 확인할지, 목표와 무관한 불필요한 일을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관리가 부족한 경우가 잦다.
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목표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핵심이 누락되어, 구성원이 잘못된 방향으로 리소스를 쏟는 경우다. 목표의 배경이나 맥락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으면, 구성원은 실제 목표와 관련 없는 일에 자원을 낭비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성과는 지지부진하고 구성원의 동기도 점차 저하된다. 목표 달성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따라오는 것은 성과 저하뿐 아니라 장기적인 리소스 낭비다.
두 번째는 목표가 설정된 후 그 진행 상황을 체크하지 않아 목표 달성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다. 목표만 전달되고, 진행 중에 성과 피드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제 목표가 달성되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OKR과 같은 프레임워크가 도입되었지만, 현장에서 이를 일관되게 활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OKR의 원리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무에 치이다 보면 본래 목적을 상기하며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의 목표를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기하지 않으면, 기업의 목표 관리 역시 내 사진 촬영 습관처럼 흐트러지고 만다. OKR의 의도와 목적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이를 꾸준히 실천하지 않는다면 목표는 결국 또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단지 목표 설정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한 관리가 지속되지 않을 때 벌어지는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갈등 속 본질을 찾아내는 린치핀 매직

음주운전이 좋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두고 처벌 강도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음주운전에 대해 극단적으로 사형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고가 없었다면 경고로 넘어가자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디테일한 차이에 얽혀 반복되는 논쟁은 조직에서도 흔히 발생하며,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사소한 차이점에 집중한 나머지 논의가 깊어질수록 감정적 대립으로 흐르기 쉽고, 결국 진정 중요한 상위 기준은 잊힌 채 각자의 신념을 고수하는 데 에너지를 쏟게 된다. 협업의 동력도 이런 과정에서 약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스 고딘이 『린치핀』에서 말한 ‘린치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린치핀은 조직이 최상위 목표와 상위 기준에 맞춰 흐르도록 논의의 방향을 재정비하고, 본질을 되찾아 협업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갈라진 의견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린치핀은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인 사람들 간의 소통을 돕고 공통의 목표로 논의를 수렴시킨다. 조직이 커질수록 이해관계와 시각 차이가 넓어지기에, 린치핀이 연결을 통해 만들어내는 가치는 더욱 빛난다.
특히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린치핀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디테일에 치우친 충돌로 인해 협업이 흔들릴 때 상위 기준을 되새기고, 본질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린치핀은 소통의 중심에서 사람들을 이어준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조직의 생산성이 회복되고, 목표를 향한 협력의 동력이 확보된다. 논쟁 속에서도 본질을 지키고자 하는 린치핀의 역할은, 조직 내에서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함께 나아가도록 돕는 핵심적 역량이 된다.


흐려지는 현실과 다가오는 가상

커튼 뒤 위엄을 뽐내던 오즈의 마법사가 사실은 연약한 노인에 불과했던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가 이제는 단순한 동화가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시대가 되었다. 인스타그램 속 멋진 모습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고, 온라인에서 소통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가상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버추얼 BJ가 방송을 주도하고, 남성이 여성 캐릭터와 목소리로 무대를 꾸미며, AI가 댓글로 여론을 형성하는 요즘,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이미 무너지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특히 이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 어느새 이러한 경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제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너머에 있을 실제 모습이나 존재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대신 화면에 보이는 이미지나 글 속의 캐릭터 자체를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이며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더욱 진짜 같은 현실로 여기게 되었다. 실제 모습이 어찌 되었든, 온라인 속 모습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점차 영향력을 키워가는 이들은 현실의 무대를 떠나 온라인 속 인격과 캐릭터에 머물고, 그것을 진짜 자아처럼 여기며 가상 세계 속에서 존재감을 확장해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제는 AI와 인간을 구별하기 위한 인증 방법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과연 AI와 인간을 굳이 나눌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콘텐츠를 소비할 때 그 창작자의 오프라인 인격이나 삶의 진정성보다는 화면 속 매력적인 이미지와 메시지에 더 끌리는 것이 현실이다. 연예인의 모습도 그렇다. 사생활이 어떻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스크린 속 모습과 캐릭터다. 그렇다면 온라인에서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AI를 따로 볼 이유가 있을까? 그저 우리는 화면 속에 펼쳐지는 매력적인 모습에 반응할 뿐이다.
어쩌면 AI는 인간이 잊고 지내던 인간성을 다시 일깨워 줄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획일화된 생각과 취향이 만연한 사회에서, AI가 다양한 관점과 감각을 창출해준다면 인간의 정서에 오히려 신선하고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모방하는 AI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다양성은 사람들의 삶에 색다른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인간성과 AI의 구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온다면, AI는 현실에 없는 존재지만 동시에 우리의 일상에 깊이 스며든 상징적 인격체,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이런 변화를 억지로 막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


상사의 머리속 정답 맞추기 게임

회사 생활에서 때로는 상사가 구체적인 지시 없이 정답만을 기대하는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다. 상사의 머릿속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팀원들에게 그 답을 직접 알려주지 않고 추상적인 기대만을 남긴 채, 계속해서 “이건 아니야”라고 말할 때 일이 더욱 복잡해진다. 이런 상사들은 마치 포수의 사인을 계속 거부하는 투수와 같다. 명확한 지시 없이 답만을 요구하니, 팀원들은 끝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방향을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상사는 세 가지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첫째, 모든 디테일을 스스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상사는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며 일종의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방식은 팀원들의 자율성과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 팀원들이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을 기회를 박탈당하며, 결국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된다. 상사의 지나친 간섭은 팀원들에게 부담이 되고, 그들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팀원들은 상사의 지시에만 의존하게 되고, 성취감도 떨어진다.

두 번째 방식은 상사가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경우다. 이는 팀원들에게 일의 대부분을 위임하지 않고 상사가 직접 해결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 경우, 상사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며, 팀원들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상사는 레버리징을 할 수 없게 되고, 팀 전체의 효율은 낮아진다. 팀원들은 일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저 상사의 결과물을 기다리기만 하게 되어 팀의 동기부여와 사기가 점점 떨어지게 된다.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상사가 과정에는 관여하지 않고, 결과만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방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팀원들과 목표에 대해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상사가 팀원들에게 충분한 신뢰를 보내야 한다. 상사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팀원들이 자율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상사들은 이 방법을 채택하면서도 목표를 명확히 전달하지 않거나, 팀원들을 신뢰하지 못해 결국 문제를 일으킨다. 상사의 신뢰와 명확한 목표 설정이 부족하면, 팀원들은 자신감을 잃고 결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이런 상사들은 방향 없이 추상적인 피드백만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팀원들은 상사의 기대를 맞추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지고, 계속해서 상사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호하다. 상사의 기대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팀원들은 자율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만, 그 노력은 정답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없이 수정과 재작업만을 반복하게 된다.

결국 팀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상사는 추상적인 개념에서 전략을 세우지 못하고, 구체적인 결과가 나와야 그제야 피드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상사의 피드백은 여전히 애매하다. “여기에서 조금 더 추가해”라든지 “이 부분을 빼보자”는 식의 모호한 지시가 반복되고, 팀원들은 결국 무엇을 해도 정답이 아니라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사 밑에서는 팀원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제대로 된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려는 듯한 반복된 시도 속에서 시간만 흘러가고, 상사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팀원들은 결국 자율성을 잃고, 상사의 반응에만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팀 전체의 사기는 점차 떨어지고, 일에 대한 책임감도 희미해진다.

이런 무력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 다시 개선하는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런 상사와의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게임과 같다. 계속해서 상사의 머릿속 정답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정답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