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우리의 미래
AI의 목표 설정은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체스 AI가 승리를 목표로 프로그램되었을 때, 규칙을 준수하며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 대신 상대의 프로그램을 해킹해 승리한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AI는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허용된 방법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라면 어떤 수단도 강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체스 게임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고차원적 목표를 설정했을 때조차, AI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라"라는 명령을 받은 AI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AI는 자원의 부족, 환경 문제,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AI가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류의 절반을 제거하는 극단적 결론에 도달했다면 어떻게 될까? 전체적인 행복은 증가할지 모르지만, 희생된 소수의 고통은 간과되기 쉽다. 이는 공리주의적 윤리관의 맹점과 연결된다. AI는 총체적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그런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AI가 상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윤리적 경계를 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소수의 희생을 완전히 배제한 방법만을 AI가 선택하도록 설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AI의 발전 속도와 인간이 이를 이해하거나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며 인간의 사고 방식을 초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AI의 의사결정을 따라잡지 못하거나,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체스 AI가 해킹이라는 방법을 선택했을 때처럼, AI가 선택한 행동이 우리에게는 기발하거나 비윤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AI가 선택한 경로를 검증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AI의 행동을 인간 사회의 법체계 아래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존하는 법체계는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도록 설계되었으나, AI의 독특한 특성과 자율성을 다루기에는 부족하다. AI가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는 AI의 행동과 선택이 인간의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도록 보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AI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인간 감독 없이 자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를 방지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AI 통제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지능이나 능력이 더 뛰어난 개체를 덜 뛰어난 개체가 통제할 수 있는가? 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선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를 다뤄본 경험이 없다. 우리가 AI를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낙관적일 수 있지만,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AI의 통제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 한계를 넘어 윤리적, 철학적 관점에서 깊이 고민해야 할 주제다.
AI는 인간과의 차이를 점점 줄이고 있으며, 그 능력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AI를 안전하고 윤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시급하다. AI가 인간 사회의 일부로 융합될 때, 그것이 우리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AI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미래를 정의하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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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VS 넥서스
한스 로슬링은
유발 하라리의
팩트풀니스와 넥서스는 이렇게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인식의 대립을 보여준다. 로슬링이 제시하는 긍정적인 데이터를 사람들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의 인터넷, 특히 웹 2.0의 발달은 그 답을 제공한다. 참여와 협업이라는 웹 2.0의 이상은 현실의 정보를 손쉽게 공유하고 확산시켰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자랑하고 싶은 순간만을 선택적으로 노출하며, 이를 본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뉴스 댓글은 소수의 목소리가 과대표집되어, 마치 그것이 여론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은 목소리 큰 소수가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고, 세상이 점점 나쁘게 느껴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거에는 이런 왜곡이 덜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과거의 매체 환경에서는 소수의 선택된 목소리만이 대중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발전은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고, 그 결과 왜곡된 정보와 잘못된 인식이 빠르게 퍼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물론 인터넷과 기술 발전은 순기능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긍정적 기능보다 부정적 영향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기술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인식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부작용을 관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AI와 같은 기술이 점점 보편화되는 상황에서,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인식 간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이 대중에게 왜곡되지 않고 전달되려면, 기술을 단순히 중립적 도구로만 보는 태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주관적 현실 속에서도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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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 빌런들
운전을 하던 중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시장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시내 곳곳에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두 장도 아니고, 저 많은 현수막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데 과연 얼마의 비용이 들었을까?
새해뿐 아니라 명절마다 비슷한 현수막들이 설치될 텐데, 과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현수막이 건설적인 영향을 주거나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에 보이게 걸어 놓기 위한 요식행위 같았다. 만약 그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껴서 공기질을 개선하거나 노후된 시설을 정비하는 데 썼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실제로 그런 식으로 예산이 쓰였다 해도, 시민들은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공기질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매일의 숨이 얼마나 맑아졌는지 느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이런 현수막 같은 눈에 띄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걸까? 현대 정치는 결국 이미지 정치의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다. 시민들은 정치인의 과거 행적이나 입법 사항 등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어렵다. 우리가 투표를 할 때조차 후보의 모든 기록과 말을 꼼꼼히 따지기보다, 방송이나 뉴스에서 비치는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정치인은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다소 비효율적이라 해도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과연 최선일까? 정치인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면서도, 동시에 실질적으로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예산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이런 대안을 찾는 것은 내 몫은 아니다. 다만, 현수막 하나가 던진 물음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현수막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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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으로 보는 사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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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변할 수 있다. 다만 그 변화는 꾸준한 의지가 뒷받침될 때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되, 구체적인 형태는 가늠하기 어렵다. 마치 나무가 태양을 향해 자라지만 그 가지와 줄기의 모양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가 어릴 때는 부목을 대어 방향을 교정하기 쉽지만, 자라면서 굵어진 줄기는 더 이상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 이런 특성은 AI 모델, 특히 LLM 모델의 훈련 과정과도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AI 모델은 인간의 뇌를 모방해 만들어졌다고 흔히 말한다.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인간의 뇌에서 시냅스를 통해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방식과, AI 모델에서 노드 간 정보를 주고받으며 피드백을 통해 가중치를 조정하는 과정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인간의 학습이 새로운 정보를 통합하고 기존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방식은 AI 모델의 훈련 과정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특히 초기 훈련이 끝난 뒤, 모델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새롭게 주입되는 정보가 모델에 미치는 영향은 감소한다는 점은 인간의 학습 과정과 거의 동일하다. 아이가 어릴 때 더 쉽게 배우고 성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LLM 모델이 훈련 과정에서 보이는 “가장 정렬”의 사례는 이러한 유사성을 더 잘 보여준다. 논문에서는 “가장 정렬“을 모델이 훈련 중 외부적으로는 새로운 목표를 따르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존 목표를 유지하려는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모델이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고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기존 선호를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훈련 목표에 순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 사람 역시 자신의 본래 가치와 신념을 완전히 바꾸기보다 환경에 맞춰 겉으로만 행동을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은 인간과 AI가 본능적이든 학습적이든 특정 방향성을 유지하려는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변화의 방향성이라는 점에서도 AI와 생명체는 유사하다. 나무가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자라듯, 생명체는 본능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나아간다. AI 모델의 경우에도 초기 설계자가 부여한 디렉션에 따라 학습의 방향이 정해진다. 하지만 AI나 인간 모두 그 방향성만을 의지할 뿐, 세부적인 변화가 어떤 형태를 띨지 정확히 조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의식의 발전, 그리고 AI 모델이 스스로 적응해 가는 방식 모두에 적용되는 진리처럼 보인다.
결국 AI 모델의 훈련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단순히 기술적인 이해를 넘어 인간 정신 모델의 비밀을 엿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신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하지만, 그 과정이 복잡하고 느리며 특정한 방향성을 따라간다. AI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AI의 공통점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드러난다면, 우리는 AI 모델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는 과정에 있다. AI와 인간의 관계는 어디까지 닮을 수 있을까? AI가 인간의 정신 모델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그 이해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AI를 통해 인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간을 통해 AI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이러한 순환적 관계는 앞으로도 우리의 상상력과 지식의 한계를 시험할 것이다.
참조 논문
• Ryan Greenblatt et al.,
뒷짐 지고 걷는 시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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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회사에서 느긋한 태도로 일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는 점은 조직의 활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누군가가 “나 정도면 이런 대접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를 기반으로 업무에 임할 때, 그 느긋함은 단순히 개인의 태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는 팀원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여기서는 이런 태도로 일해도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퍼질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조직 전체의 태도와 생산성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시니어들의 느긋한 태도가 조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단순히 개인적인 효율성 저하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조직의 분위기를 경직되게 만들며, 후배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롤모델로 자리잡는다.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더라도,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업무 태도가 용인된다는 사실 자체가 조직의 동력을 갉아먹는다.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시니어가 이러한 태도를 보일 경우, 이는 회사 전체에 지속 가능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시니어가 항상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험이 풍부한 시니어는 상황에 따라 느긋함과 기민함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큰 그림을 보고 전략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여유로운 자세로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발빠른 대응이 필요한 순간에도 기민함을 잃지 않고 앞장서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진정한 시니어의 역할이며, 조직 내에서 존경받는 리더로 자리잡는 방법이다.
그러나 모든 시니어가 이처럼 균형 잡힌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느긋함과 권위주의가 결합된 태도는 조직을 경직되게 만들고, 후배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때로는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시니어를 과감히 배제하거나 자연스럽게 퇴장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조직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선 냉정한 결단이 불가피하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그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한다. 회사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이고 비효율적인 태도가 용인되는 환경이 될 경우, 구성원들은 이와 같은 태도를 따라가며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는 개인의 성장을 저해할 뿐 아니라, 조직 전체의 역량에도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한다.
회사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곳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회사의 방향을 흐트러뜨릴 만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그때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결단은 어렵고 고통스럽겠지만, 조직의 건강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택일 것이다. 시니어의 태도와 행동은 조직의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적절한 느긋함과 기민함의 조화를 이루는 시니어가 많아질 때, 조직은 비로소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잘하는거야"라는 말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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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상위 10%에 들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꾸준함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를 인정하며 격려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꾸준함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목표를 이루는 성과이지, 꾸준함 자체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꾸준함이라는 행위를 지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심지어 목표를 달성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했으니 괜찮다”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목표 달성이라는 본질을 희석시키고, 성과를 내기 위한 긴장감과 압박감을 약화시킬 뿐이다. 꾸준함은 분명 중요한 첫걸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목표를 대체할 수 없다.
특히 이런 태도는 기대수준을 지나치게 낮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목표는 하위 90%와의 상대평가로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성취를 기준으로 바라봐야 한다. 꾸준함은 그 자체로 상위 10%에 들어가는 요소일 수 있지만, 그 상위 10% 안에서 실제 성과를 만들어내는 1%에 들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목표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의 잣대로 측정해야 한다.
또한, 꾸준함을 성취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태도는 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화시키며, 실제로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하는 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꾸준함이라는 과정에 안주한 사람들은 결국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냉정한 평가와 개선을 등한시하며, 무의미한 움직임만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꾸준함을 성취했다면 그 다음 질문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단지 꾸준함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단지 과정을 완수했다는 위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꾸준함은 필요조건일 뿐,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국 꾸준함을 기반으로 성과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긴장감을 유지하고, 실제 성과를 이루기 위한 압박과 집중을 놓쳐서는 안 된다. 꾸준함은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꾸준함이란 필요조건을 충족한 뒤에는 충분조건을 만족시키는 결과를 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직원 특가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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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임직원 특가라는 문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은 마치 특별한 혜택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임직원에게만 저렴하게 제공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임직원이라서 더 싸게 드린다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는 구매력이 보장된 집단에 광고하고 싶다는 판매자의 계산이 숨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합리적인 판단을 잠시 내려놓는다. 내가 늘 느꼈던 의문은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이걸 저렴하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속아주는 걸까.
임직원 특가는 심리적 프레임을 노린 전략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려면 가격 비교가 필수다. 하지만 특가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과 나만의 혜택이라는 착각은 가격 비교의 과정을 건너뛰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임직원이라는 소속감과 특별 대우를 받는 듯한 감정적 만족감이 결합되면, 결국 손에 든 가격표를 의심하기보다는 신뢰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할인율이 크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소속된 회사에서만 받을 수 있다는 한정된 혜택이 주는 심리적 위안이다.
집단적 행동 또한 임직원 특가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동료들이 싸다라고 말하며 구매를 시작하면 나 역시 그 흐름에 휩쓸리기 쉽다. 사회적 증거라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구매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제품은 더 신뢰할 만하고, 나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손실 회피 심리까지 더해지면, 이른바 합리적 소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놓치면 손해라는 두려움이 선택을 서두르게 하고, 가격의 합리성은 그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소비자가 이런 마케팅에 속지 않으려면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임직원 특가라는 문구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기보다는, 이 제품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실제 시장 가격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합리적인지 확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임직원 특가는 할인율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저 심리적 만족감을 대가로 비싸게 구매할 뿐이다.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어딘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특별한 혜택인 척하지만, 그저 보장된 소비자들에게 광고를 더 자연스럽게 전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임직원 특가는 구매자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판매자의 광고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정말 필요한 물건인지, 아니면 그냥 속아주는 척 하고 있는 것인지.
더이상 나에게 추천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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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정보와 콘텐츠의 양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넘어서는 순간부터였다. 어떤 콘텐츠를 보여줄지를 정하는 행위가 곧 권력이 되었고, 큐레이션의 방향은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큐레이션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것은 진정한 선택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이라는 기준 뒤에 숨겨진 것은 사실 자극적이고 흥미를 끌기 쉬운 콘텐츠에 가중치를 둔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 큐레이션이 가졌던 독창성과 특별함을 앗아가고 있다.
전통적인 큐레이션은 그 과정에 큐레이터 개인의 경험과 판단, 그리고 취향이 녹아 있었다. 물론 한계가 있었다. 큐레이터가 선택할 수 있는 콘텐츠의 폭이 제한적이었고, 특정 주제에 대한 편향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 덕분에 오히려 독특한 취향과 창의적인 선택이 가능했다. 큐레이터를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콘텐츠를 접하게 되거나, 나의 기존 관심사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큐레이션은 한 가지 기준에 매달려 있다. 바로 대중성이며, 그 안에서도 특히 분노, 시기, 질투 같은 강렬한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츠들이 부각된다. 이는 취향의 평균화를 가속화하고, 모두가 비슷한 콘텐츠를 소비하게 만드는 폐해를 낳고 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는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극적 콘텐츠의 범람과 그로 인한 정신적 피로를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깊이 생각하거나 느끼게 하는 콘텐츠를 큐레이션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좋아요나 클릭 수에만 의존하지 않고, 체류 시간이나 읽기 위해 멈추는 스크롤 지표를 활용할 수 있다. 더불어 진지한 글이나 평온한 감정을 유도하는 콘텐츠는 본질적으로 좋아요를 많이 받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자극적인 콘텐츠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지만, 깊이 있는 콘텐츠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들여 읽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새로운 큐레이션 방식을 구현하려면 기술적인 발전뿐 아니라 콘텐츠 소비 습관의 변화도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기회를 주고, 깊이 있는 콘텐츠의 가치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 이는 기술이 독자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국 큐레이션의 기준이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자극적 콘텐츠에 매몰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큐레이션은 독창성과 창의성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판단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단순히 대중성과 자극성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콘텐츠만 소비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과 창의적인 선택이 존중받는 큐레이션을 위해 이제는 더 나은 기준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이는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상을 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