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나의 일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것, 내가 세상에 머무르는 시간은 우주 전체의 역사에 비해 찰나와 같은 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의 고민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창밖의 투명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가 우주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고 상상해 봤다. 연료가 없어서 난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가 없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막막하기만 하다. 이런 상상을 하면 가족들이 나에게 하는 사소한 거슬리는 행동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억겁의 시간 속에 놓인 순간을 살아가고, 지금 이 찰나에 화가 나고 배가 고프다. 우주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 일이 나에게는 전부인 일이다. 아무 것도 아닌 미미한 생물에 불과한 내가 전부인 것처럼 느끼면서 살고 있다.
나는 솔로, 빌런의 탄생 과정 - 나도 빌런이 될 수 있다
저는 연애 관찰 예능을 매우 즐겨보는 편입니다. 예전 ‘짝’의 모든 방영분을 정주행 했었고, ‘선다방’, ‘스트레인저’, ‘로맨스 패키지’, ‘하트시그널’, ‘러브캐처’, ‘한쌍’, ‘나대지마 심장아’, ‘에덴’ 등을 모두 섭렵 했으며, 최근에는 ‘나는 솔로’를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는 연애의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간의 심리가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규홍 PD가 연출한 ‘짝’, ‘스트레인저’, ‘나는 솔로’를 가장 좋아합니다. 다른 프로그램들은 PD의 개입이 큰 편이고, 그림을 예쁘게 만들려는 노력이 보이는 편이라면, ‘나는 솔로’는 날것의 느낌이 있습니다. 애초에 이름을 짓는 것에서부터 남규홍 PD의 철학을 볼 수 있는데, ‘짝’에서는 남자1호, 남자2호 등으로 이름을 정했고, ‘스트레인저’에서는 ‘작은 김씨’, ‘큰 김씨’ 등으로, 최근 ‘나는 솔로’에서는 과거에 유행했던 이름의 순위대로 ‘영수’, ‘영철’, ‘순자’ 등의 이름으로 정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정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일반인들이 출연하고 방송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 때 악플러의 타겟이 되는 것을 최소화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해서 호칭 자체로 주는 촌스러움은 이 프로그램이 그럴듯한 포장을 하기 보다는 일반인의 날 것을 그대로 드러낼 것임을 보여줍니다. 매회 되풀이 되는 이름은 개인의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찰 대상이 되는 장기말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저는 ‘나는 솔로’를 보면서 빌런이 탄생하는 과정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매 회 빌런이 등장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폭발적인 욕을 먹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빌런의 확률을 봤을 때, ‘나는 솔로’에서 빌런의 등장 확률은 지나치게 높아 보입니다. 혹자는 남규홍 PD의 선구안을 칭찬하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시청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빌런을 선별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저는 사람들이 악의로 저지르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악인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별 생각없이, 또는 선의로 어떤 행동을 했더니 그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훨씬 많을겁니다. 남규홍 PD가 인터뷰를 통해 의도적으로 빌런을 선발했을 가능성보다, 촬영을 시작했더니 빌런이 탄생했다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라는거죠.
이런 전제로 우리 주변에서 빌런을 발견할 확률보다 ‘나는 솔로’에서 빌런이 발견되는 확률이 왜 높은지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두 가지 가설을 떠올렸는데요. 첫번째는 고립된 공간에서 제한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빌런을 탄생시킨다는 가설입니다. 생물은 보통 충돌이 생기면 회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돌이 일어난 상황에서 싸움을 하는 것은 서로의 생존확률을 깎아 먹기 때문에 웬만하면 서로 피하는 것입니다. 이기더라도 싸우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게 되면 생존에 유리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애정촌’이라는 그라운드는 일주일 간 빠져나갈 곳이 없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목적이 다르다면 평화롭게 지낼 수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모인 모두는 괜찮은 이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동일한 목표를 가집니다. 고립된 공간에서 희소한 목표물이 있다면 싸움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물론 이성의 마음을 쟁취하겠다는 마음을 일찌감치 포기한다면, ‘CCTV’나 ‘나는 솔로 1열 참관인’, ‘펜션주인’ 같은 타이틀을 얻으며 유유자적하며 일주일을 쉬다가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건 논외로 하겠습니다. 결국 싸움과 경쟁이 발생하면 인간은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밑바닥까지 보여주게 됩니다.
이 가설보다 좀 더 그럴싸한 것은 ‘내로남불’에 대한 것입니다. ‘내로남불’은 인간의 패시브 스킬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완벽하게 ‘내로남불’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로남불’이 극대화 되는 과정이 눈에 보인다면 사람들은 욕을 하기 시작할겁니다. 이번 10기에서도 한사람에게 확신을 주고 싶다면서 영식과 포옹을 한 영자, 난척이 가장 싫다면서 누구보다 오픈하고 싶어하지만 매사에 삐지는 상철,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하면서 옆에 있는 모든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영식, 예체능은 싫다면서 현숙에게 대쉬하는 영호 등등 내로남불과 인지부조화가 판을 칩니다. 이들 모두는 빌런 후보로 등극하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빌런들을 보며 욕하는 자체도 ‘내로남불’이라는 겁니다. 제가 저 상황으로 들어간다면 전 빌런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24시간 내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가 촬영합니다. 저의 24시간을 찬찬히 되돌아 보고 편집을 조금 해보면 저도 수많은 빌런짓을 했습니다. 와이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와이프가 집안일을 하는데 폰으로 게임만 하고 드러누워 있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빠지만 아이들이 재잘거리는걸 보고 시끄럽다고 방에 들어가서 놀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살이 찌는게 너무 싫어서 다이어트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다섯 개 꺼내 먹기도 했습니다. 이거 완전 빌런 아닙니까? 여러분 앞에서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그 지인이, 당신을 만나지 않는 특정 시간에는 빌런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가설을 합쳐보면, 저런 환경에서 24시간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면 저는 분명히 빌런으로 등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나는 솔로’에서 빌런이 등장하면 인터넷 게시판이 불타고 시청율이 올라가는 것은 나도 빌런이 될 수 있다는 내 무의식과, ‘나는 저런 놈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합쳐진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저는 연애 관찰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보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고, 빌런이 등장해서 날뛰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지나친 감정이입 없이 보면 ‘나는 솔로’는 비극이 아닌 희극 작품입니다. 매주 수요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나는 솔로’가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OKR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그리고 자기 암시를 하면 우주의 기운이 모여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허무맹랑한 얘기인데요. 이 기법에서는 종이에 자신의 목표를 적어놓고 항상 읽어 보라고 합니다. 아침 저녁 큰 소리로 목표를 외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약팔이 같은 방법에 사람들은 불신을 표하고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미신같은 얘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기업들까지 도입한 것이 있는데요. 바로 OKR 이야기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불신이 왜 생기기 시작했는지 생각해보면, OKR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점차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자명해 보입니다. 결국 어떤 좋은 기법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람이거든요. (애자일도 그랬었죠…)
먼저 끌어당김의 법칙이 유용한 이유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우주의 기운이 다가온다느니, 온 우주의 주파수와 내 목표의 주파수가 일치한다느니 하는 얘기는 하지 않을겁니다. 내가 지금 100억대의 부자가 되겠다고 목표 설정을 한다고 해보죠. (전 실제로 이런 목표를 잡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미친 목표라고 생각하겠죠. 이게 바로 OKR에서 말하는 문샷골입니다. 달나라에 가겠다는 목표는 기존 사람들에게 미친 목표였겠죠. 하지만 이런 미친 목표를 여전히 가진 기업이 있습니다. 화성에 가고 싶어하는 어떤 사람이 떠오르네요.
미친 목표를 세우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애초에 미친 목표가 아니면 사람들은 자신의 패러다임 속에서 자기가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목표로 생각합니다. 패러다임은 스스로 쉽게 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박스 속에서의 생각이라고 하죠. 반대로 자신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생각을 ‘아웃 오브 박스’라고 합니다.
미친 목표는 박스 바깥의 목표입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우리는 미친 목표 하나를 생각함으로써 박스 바깥에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내 현재 위치는 박스 안의 점이고, 박스 바깥에 있는 목표도 점입니다. 점과 점은 선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선을 가지게 되면 부수적인 효과들이 매우 많이 발생합니다.
목표점 설정으로 생기는 선은 벡터에 가깝습니다. 벡터는 방향성과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밭을 갈 때 우리는 한걸음 앞으로 전진하지만, 저 멀리 있는 나무를 보지 않으면 방향성을 잃게 됩니다. 비뚤거리는 결과만 남게 되겠죠. 아무리 멀어 보이는 목표라도 목표가 찍혀 있는 것과 아닌 것은 제로투원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바라보고 가는 목표는 크면 클 수록, 멀리 있을 수록 좋습니다. 이걸 좋은 말로 비전이라고 얘기하죠. 멀리 있는 목표가 좋은 이유는 그 목표를 보고 계속 전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을 보고 항해를 하던 선원들은 북극성에 도달한다는 생각이 아닌 북쪽을 향해서 간다는 생각으로 항해를 했을겁니다.
그리고 목표점은 당기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목표는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므로, 현재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그 방향으로 당기게 됩니다. 현재의 우리는 매우 미미한 존재라 작은 중력을 가집니다. 거대한 목표는 블랙홀처럼 매우 강한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목표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힘을 받게 되는겁니다. 일생을 방황하게 되는 것보다는 목표를 설정해 두고 그 쪽으로 끌려가는 힘을 항상 받고 있는게 훨씬 도움이 되겠죠.
마지막으로는 나의 현재와 최종 목표 사이에 선이 생겼기 때문에 선의 중간중간에 다른 점을 찍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마일스톤이라고 부릅니다. 마일스톤은 목표로 가기 위한 단계들입니다. 최종 목표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일스톤을 찍을 수 있습니다. 목표점이 없을 때 찍는 점들은 무의미한 방황들이 되겠죠. 마일스톤은 우리가 달성하지 못하는 거대한 목표 대신에 단기간에 달성해 나갈 수 있는 작은 목표들입니다. 작은 목표들을 달성하며 우리는 성취감을 느끼고, 그것은 다음 마일스톤으로 가는 동력이 됩니다. 마일스톤은 달성하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힘을 줄 뿐 아니라, 하나씩 달성해가면 최종적인 목표에 점차 다가갈 수 있습니다. 마일스톤은 OKR에서 말하는 Key Result와 유사합니다. 상대적으로 단기간이므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설정할 수 있고 측정할 수도 있게 됩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었더니 남이 되는 것처럼, 박스 바깥에 찍는 점 하나는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종교적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보다, 인간의 의지와 목표의식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면 조금 더 믿을만한 이야기가 됩니다. 어딘가에 적어놓고 큰 소리로 외치는 행위는 OKR을 엑셀에 적어놓고 매 분기 확인하고 트래킹 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죠. 설정한 목표에 대해 잊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보고 외치는겁니다. 설정해 둔 그 ‘점’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의 무의미해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