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똥을 싸는 시대
현대 미디어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과거에는 지상파 3사와 몇 종류의 신문처럼 제한된 채널을 통해서만 자신의 창작물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이때 생산자는 매우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비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했다. 창작물이 세상에 노출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인 동시에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과 다양한 플랫폼의 발전으로 누구나 손쉽게 자신의 생각을 게시하고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생산의 문턱을 낮추는 데 그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생산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생산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팔려는 사람만 있고 사려는 사람은 없는’ 상황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과잉생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넘쳐나는 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창작하고 드러내려는 욕구는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 크레타 벽화에서부터 시작된 예술적 표현은 그 역사를 증명한다. 인터넷은 이러한 본능을 충족시키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했다. 비용이 적게 들고, 노출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창작물은 물질적 공산품과 다르게, 지나친 과잉생산으로 인해 가치를 인정받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공산품의 과잉생산처럼, 지금 우리는 창작물의 과잉생산 시대를 살고 있다.
과잉생산의 결과로, 창작물은 넘쳐나지만 그 가치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모두가 생산자가 되었기에 이제 누구도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딜레마가 발생했다. 이 현상은 마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이야기처럼, 특정 집을 표시해 찾으려는 도적들의 계획을 알리바바가 마을 모든 집에 같은 표시를 해두며 무력화한 상황을 연상시킨다. 이로 인해 과거보다 노출의 기회는 줄어들었고, 큐레이션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적절한 큐레이션은 과잉생산된 창작물 속에서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비자가 없는 상황에서 생산의 가치는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결국 소비자가 없다면 생산물은 가치를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본능적인 표현 욕구를 반영하는 동시에, 과잉생산으로 인해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과도 연결된다. 이제 생산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히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증명하고 소비자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현대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분명히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생산자가 특별했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그 평준화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찾고, 소비자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그저 인간의 본능과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헤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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