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고기 논란에 대하여 글을 쓰게 된 것은 오랫동안 개를 식용으로 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어 왔으나 찬반 양편 모두가 논란이 생기는 핵심적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하거나 감정적인 이유들로 본질을 벗어나는 것을 보고 그 논란의 핵심에 대해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반대하는 쪽은 주로 감정적인 측면에서 호소를 한다. 개는 오랜 세월 사람의 친구였고 사람에게 정서적으로 크게 도움을 주는 동물이다. 그럼 찬성하는 측에서는 소도 오랜 시간 우리의 친구였고, 돼지도 그렇고, 닭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 중에 육식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이런 점 때문에 개고기를 찬성하는 측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만 측은하게 여기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가식적이라 비난한다.

 

 

< 너무나도 선한 눈을 하고 있지만 이 소들은 내 친구가 아니므로 내가 소고기를 먹는 것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

 

티비에서 이다도시가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반대하며 개는 우리의 친구임을 역설 했을 때 로버트 할리는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할리의 이 말이 달팽이 한마리의 존엄성에 대해 말한 것이라면 모기가 달팽이보다 못할 이유는 무엇이며 바퀴벌레가 달팽이보다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 역시 여름에 모기를 때려 잡을테고 장판에 기어가는 바퀴 벌레를 내려칠 것이다. 할리의 이 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리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동물의 식용에 대해 생각할 때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개가 닭이나 소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식용으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우위로 식용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한다면 다른 부족을 먹는 식인종의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식인 문화라든지, 개고기 문화 등등을 문화적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는 나타난 현상에 대한 결과론적 분석일 뿐, 왜 그런 문화가 형성되었는지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위에서 보았듯이 개고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감정적인 이유, 생물학적 이유를 주로 내세우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상대성을 강조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개고기 논란은 인간의 감정적인 이유에서 출발하는 것이 맞다. 이것을 인정하면 개고기 논란은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싸이코패스는 제외하자. 인간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작은 공감의 단위는 가족이다. 서로가 공감을 하게 되면 친구가 된다. 하지만 공감을 하게 되어 무리를 형성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다른 무리에게 배타성을 띄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썼던 글에서 이기주의 범주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이기주의의 범주 = MAX(이익이 상충되지 않는 집단)

 ‘공감‘이라는 키워드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서로 공감하는 무리가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무리와 대형으로 충돌하는 것이 전쟁이고, 전쟁 중에는 적군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죄책감 없이 행해진다. 배타적인 부족과의 전쟁 후에 적의 고기를 먹었던 식인 풍습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공감하는 능력은 사람에게만 있는 능력은 아니다. 무리 생활을 하는 모든 동물에게 공감하는 능력은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었을 것이다. 개를 키우면서 개가 닭을 사냥해 오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개가 강아지일 때부터 병아리와 닭을 자주 보여주고 그들과 같이 자라게 하면 개는 닭을 공격하지 않는다. 동물원에서 사육사에게 자란 호랑이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동물이 친구인가 사냥감인가 구별하는 것과 사람이 친구인가 식량인가 구별하는 메카니즘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서로 공감을 했으면 친구이니 먹어서는 안되고 공감을 하지 않았으면 배가 고플 때 먹으면 된다. 지극히 간단한 논리이다. 이런 점에서 앞에 할리가 했던 달팽이 발언은 반은 틀리고 반은 맞다고 한 것이다. 공감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교감‘이다. 서로 감정을 나눈 후에 공유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달팽이는 인간과 교감할 수 없다. 그래서 할리가 친구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말은 맞지만 달팽이가 친구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할리는 달팽이가 우리의 친구라고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할 것이 아니라, 친구가 아닌 식용견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어야 한다. 내가 애완동물을 판별할 때 기준을 ‘주인을 알아보는 동물’로 한정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목적이 감정적 교류를 통해 정서적 기쁨을 얻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 놈이 나를 알아봐 줄 때 기쁨을 느낄 것이다.

 

< 죽기 전까지 나와 많은 교감을 나눈 똘똘이 >

  ‘공감‘과 ‘교감‘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만 이해하면 개고기 논란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 친구인(교감을 나눈) 개는 먹으면 안된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식용견은 먹어도 된다. 달팽이는 교감할 수 없으므로 친구가 아니다. 모기와 바퀴벌레 역시 교감의 대상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때려 잡아도 된다.

이것으로 개를 먹어도 되는가 안되는가, 다른 동물은 어떤가에 대해 애매한 것을 모두 정했으니 오늘의 글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