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2/3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다 – 니체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여름 방학 보충 수업 동의서를 나눠주며 ‘참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 오라고 했다. 나는 다음날 ‘불참’에 내 사인을 해서 제출했다. 동의서에는 분명 ‘참가’와 ‘불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방학 동안 나의 운명을 내가 결정하고 싶었을 뿐이다. 유일하게 ‘불참’을 선택했으며, 불경스럽게도 부모님의 사인이 아닌 내 사인을 한 죄로 나는 교무실로 불려갔다.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왜 ‘참가’에 사인을 받아오지 않았는지 묻는 담임 선생님에게 나는 ‘방학 보충수업은 자율적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어떻게 보면 싸가지 없는, 다르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을 했다.

나는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하지 않았고, 집에서 EBS 수학 강의를 보며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의 짜증을 보다 못한 엄마는 그럴 바에는 수영이나 배우러 다니라고 했고, 나는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여성회원들만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었던 수영강사 덕분에 아직 수영을 하지 못하긴 하지만.

방학 보충수업 외에도 아침 보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8시가 채 되기도 전에 0교시 수업이 있었고,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교실에서 모두들 공부를 해야 했다. 나는 과외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아침 보충수업은 빠질 법한 명분을 찾지 못했기에, 그 추운 겨울 7시가 되기 전 버스를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나는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며 생각한다. ‘왜 우리는 그렇게 오래 학교에 묶여 있었어야 할까?’ 그리고 지금 많은 직장인들을 보며 생각한다. ‘왜 저들은 그렇게 오래 회사에 묶여 있어야 할까?’ 이 둘 간에는 꽤 상관이 있어보인다. 상관관계를 넘어서 어떤 인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학생 때부터 우리는 자유를 빼앗겼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양 교육 받았다. 그 시절 우리가 학교에 하루종일 있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고등학교 교육 내용을 습득하기 위해서 하루 6시간 정도의 정규수업만으로 차고 넘친다.

누군가는 혈기왕성한 학생들을 일찍 집에 보내주면 그들은 탈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몇몇 부모들은 학교가 학생들을 하루종일 잡아주기를 원한다. 이런 그럴싸해 보이는 몇몇 주장들은 결국 학생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일찍 하교를 하고 탈선을 했을지 모르는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한 꿈을 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을 학교에 묶어둠으로써, 그들에게 자유를 빼앗고, 잉여로움을 빼앗고, 생각하는 힘을 빼앗았다. 가장 나쁜 것은 학생들이 학교에 붙잡혀 있는 노예의 생활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은 자유를 저당잡히는 것에 익숙하게 만든다. 노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직장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주말 출근에 사람들은 불평을 한다. 그런데 그 불평은 분노와 저항이 아니라 자조적이다. 마땅이 그래야 하는 세상이며,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불평이다. 어려서부터 묶여있던 족쇄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이다.

고등학교에 정규수업 이외에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시간이 사라져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학교에 오래 남아 보충수업을 하고, 밤 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것에 대해 뿌듯해 할 것이 아니라, 두려워 해야 한다. 묶여있는 연습이 아닌, 잉여로워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잉여로움 속에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 보는 것이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