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며 가장 주목할만한 인식의 변화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세계지도는 빈틈이 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대륙과 바다는 상상이나 종교적 가르침으로 채워졌다. 미지의 대륙에는 난폭한 괴물이 살고 있었고, 먼 곳의 바다 속에는 불을 뿜는 용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받아 들였고,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적 사고를 촉진시키게 되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 많이 알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호기심으로 인해 관찰하고 실험하고 분석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애자일에 관해 썼던 글에서도 변화하는 환경에서는 애자일이 가지는 가치가 필수적이라는 말을 했었다. 우리는 급격히 변하는 환경에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미래의 불확정성 외에도 애자일이 가정하는 것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 즉 우리가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목표나 결과물들은 한 번에 이루어질 수가 없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품을 원하는 최종 고객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자일에서는 짧은 주기의 구현과 잦은 수정, 지속적인 테스트를 장려한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사용자가 무엇을 좋아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제품을 빨리 만들고 사용자의 만족도를 파악한다. 어차피 정확하지도 않을 예측을 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먼저 만들고, 그 반응(Feedback)을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관리할 때에도 ‘내가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고객이나 상위 이해관계자의 의중을 짐작하려 해서는 안된다. 상사가 던진 애매한 지시를 듣고, 모두는 자신의 기준과 생각으로 의미를 파악한다. 상사의 원래 의도가 이러이러 했을 것이라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는데 시간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바로 지시를 내린 상사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노력을 조금 들인다면, 각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선문답을 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편리한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선택을 잘 하지 않는다. 첫째는 상사와 이야기를 할 때 오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겪고 싶지 않아서일테고, 둘째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에는 작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 첫번째 걸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