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P가 싫어요


누구 변화 좋아하는 사람?

If you want to make enemies, try to change something.(적을 만들고 싶다면, 뭔가 바꾸려고 해라)— Woodrow Wilson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이런 성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 강해진다. 언제나 변화를 꿈꾸며 도전을 즐기는 이들은 극히 소수이다. 심지어 현실의 불만과 불안감이 없는 상태에서는 변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보기 힘들 것이다. 사람이 자연히 안정을 선호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침에 회사에 출근할 때 탔던 버스는 오늘처럼 내일도 10분 안에 정류소에 도착할 것이고, 나를 강남역에 내려줄 것이다. 어느 날 정류소로 나갔는데, 30분이 넘도록 버스가 오지 않거나,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갑자기 부산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일까. 일정하게 반복되는 최소한의 일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

J VS P

MBTI에서 상반되는 특성 중 J와 P가 있다. J는 Judgement에서 따온 머릿글자이다. J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미리 계획하고, 검증하고, 계획을 지키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보통 업무를 미리 계획하고 여유를 두고 업무를 끝내는 사람은 J 성향이 강하다. 반면 P는 Perception에서 따온 글자로 무엇이든 확정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마감일이 다가오면 그제서야 어쩔 수 없이 업무를 처리한다. 이들은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초기의 계획을 그대로 따르거나, 이미 찾아 낸 해답을 수용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J와 P는 이번 주말에 만나 파스타를 먹기로 했다. J는 미리 데이트 시간에 맞춰 음식점을 예약했다. 데이트 당일 P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고 있던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해서 만날 시간을 2시간 늦추자는 이야기였다. J는 알았다고 답하고, 재빨리 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예약 시간을 2시간 미뤄 달라고 부탁을 했다. J는 P를 만나 예약해 둔 음식점으로 안내를 했다. 그런데 음식점으로 가는 도중 일식집을 본 P는 일식이 맛있어 보인다며, 일식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이 가상의(그러나 흔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보고, J에게 감정이입이 되며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면, 당신도 J의 성향이 강한 것이다. 반면 J가 왜 불편한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P성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P는 변화를 즐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P는 자기가 주도하는 변화를 즐기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한다.
  2. P는 타인이 주도한 변화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적응할 수 있다.

임원을 달고 싶다면 P처럼

기획을 하지 않는 회사를 상상할 수 있을까? 연간 계획 없이 일 년의 업무를 시작하는 경우가 있을까? 당연히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회사가 있을 수 있다며 괴로워 하고 있을 당신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회사는 기본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분석을 하며, 분석을 바탕으로 기획을 한다. 회사는 기본적으로 J의 성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며, 임원 레벨에서부터는 P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직장은 애초에 J의 성향으로 계획하고, 수행하며, 시간을 엄수해야 하는데 왜 J가 아닌 P가 회사에서 득세하는거지??? 나는 이런 의문을 품고서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1. 불확실한 경영 환경
    아무리 예측을 하고,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미래를 예측해내기는 쉽지 않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이 맞아 떨어지려면, 우리는 모든 입력값들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며,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뉴턴도 주식으로 망하지 않았을까. 제 아무리 기업 분석을 하고 시장 상황을 파악해 봐도, 갑작스런 악재나 인간심리의 변화를 모두 예측할 수는 없다. 애초에 계획을 철저히 하고 대비를 해보아도, 변덕스런 P가 무심코 저지른 일보다 결과가 좋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P의 특성은 임원에게 필수적인 능력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2. 좀비와 같은 멧집
    상황은 언제나 변한다. 갑작스레 부서가 사라지기도 하고, 동료가 퇴사하기도 한다. 어제까지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작업이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최우선 순위의 일이 갑작스레 생기기도 한다. 출근 시간에 타던 버스가 갑자기 목적지를 지나쳐 버리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이런 당황스런 상황에서 J와 P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그 강도가 다르다. J는 계획하고, 모든 일들이 자신의 통제하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기대를 저버린 상황들이 너무나 불편하다. 그러나 P는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을 그대로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P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1.자신이 변화를 주도하는 성향과 2.타인이 주도한 변화에 무덤덤함이 P 성향의 인물들을 임원으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P가 득세한 회사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P들은 조직의 상위로 올라간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회사는 J의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인식되므로 여기서 충돌이 일어난다. P가 일관성 없이 업무지시를 하게 되면, 상사의 기대수준을 부하직원이 파악할 수가 없다. 기대수준은 매 번 바뀌며, 기대하는 결과물 역시 수시로 바뀐다. 미팅을 잡았다가 취소하기 일쑤며, 갑작스레 일이 생겼다며 야근할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계획성이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맞는 이런 상황에서 J들은 고통 받는다. J들은 자신이 맞은 업무를 누구보다 제대로 처리한다고 생각하지만, P 성향의 상사에게 샌드백 역할을 해 줄 뿐이다. 회사에서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P의 성향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P의 성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이 옳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는 아니다. 꼭 필요한 P의 성향이 회사에서 올바르게 발현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전제가 필요하다.

  1. Governance
    P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대응하는 변화를 만드는 것일 뿐,상호 합의한 기준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2. Rationality
    P는 갑작스런 변화에 대해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3. Commitment
    P는 갑작스런 변화를 만드는 경우 그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한다.
  4. Adaptation
    P는 갑작스런 변화를 만든 경우 최소한의 유예기간을 두어야 한다.

회사에서 옳다고 믿어지는 J의 성향으로 일하는 많은 직원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만들지 않으려면, P가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J의 방식을 원하는 직장에서, 결국 P가 위로 올라가 버린 아이러니 한 상황에서 오늘도 고통 속에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J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