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기(Showing)가 일상화 된 회사 문화 (Headless Chickens, Running Around)

 회사는 너무나도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가지고 있는 회사라
연봉과 복지, 안정성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회사였다.
그러나 안정성은 다르게 보면, 변화를 가로막는 벽 같은 것이었다.
회사 비즈니스의 성공여부에 상관없이 회사의 수익은 안정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회사는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구성원은 점차 보수화 되어 가고, 비즈니스의 성공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 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정치꾼들이 늘어난다.
‘효율성’에 대한 고민은 온데간데 없고,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성과에 대해
누가 더 잘 ‘포장’해내느냐가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다.
Weekly 리포트와 Monthly 리포트에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숫자가 진척률로 표시되었고, ppt 파일에는 빽빽한 글자들이 채워졌다.
보고가 있는 날이면, 팀장은 그 숫자가 제대로 채워졌는지를 보기 위해
전날 밤 11시에 퇴근하고, 당일은 7시에 나오기 일쑤였다.
새벽에 시스템 릴리즈가 있는 날이면 부서장은 실시간으로 상황을 리포팅 하기를 원했다.
시간대 별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열심히 밤을 새고 있는지를 임원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새벽 작업 중 예쁜 템플릿으로 실시간 리포팅 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나는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다.
한 시 바삐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도 모자랄 시간에
청와대에 보낼 자료를 작성하는데 시간을 쓰고 있었던 멍청이들을

효율성과 실제 성과를 중시하는 현대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조직은 정 반대로 가고 있는 조직이었다.
이런 비효율적 행태가 나의 습관으로 굳을까봐 너무나 두려웠다.
이 조직의 문화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내가 생각하는 효율적인 업무 방법 중 10% 정도를 양보하여 그것이 내 습관으로 굳는다면,
나중에 다른 조직에 갔을 때 바보 취급을 당할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비효율성과 멍청함이었다.

 

Headless Chickens, Running Around – 무슨 일인지는 파악하고 좀 뛰어 다니자…
Blind Leading the Blind – 누가 누굴 가르치냐…

실무를 모르는 부서장의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Blind Leading the Blind)

고픈 사람을 위해 라면을 끓여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옆에서 이런 지시를 끊임없이 내리는 부서장이 있다면, 라면을 끓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 라면을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정리하라
  • 짬뽕과 짜장면, 비빔면, 칼국수와 라면의 특성과 장단점을 정리하라
  • 라면을 3분 끓인 경우와 4분을 끓였을 때의 장단점을 정리하라
  • 혹시 라면을 끓이다가 물이 끓어 넘칠 때를 대비해 대처 방안을 정리하라
  • 냄비 밖으로 라면 스프가 조금 떨어진 이유에 대해 정리하라

그냥 라면 좀 끓이자고!!!!! 나는 이런 지시를 듣는 대신 그냥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것을 택했다. 저런 지시들을 모두 지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테고, 그 사이에 라면 물이 넘치든 면이 불어 터지든 하여, 애초에 맛있는 라면을 끓이겠다는 본질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 그걸 왜 그것 밖에 못했냐고 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알아서 그것도 못하냐고 하고, 흡사 사도 세자가 된 기분이 드는 하루하루가 지속 되었다. 그나마 영조는 똑똑하기나 하지. 말로 먹고 사는 컨설턴트 출신의, IT 프로젝트 관리 경험이 전혀 없는 부서장의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최악이었다. 본질을 해치는 지나친 간섭으로 인한 스트레스 자체보다 나에게 더 해가 되는 것은 이런 상황들이 나를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능동적이고 의욕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던 나에게 사도 세자 취급을 당하던 몇 달 간은 정신이 피폐해지는 기간이었다. 나는 위대한 프로젝트 결과물을 만드는데에 집중을 했으나 그와 더불어 부서장의 사소한 공격들을 막아내는데 나의 에너지를 낭비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나는 부서장의 공격만을 막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기 결혼 (Marriage Fraud)

Job description은 연애라면, 실제 회사업무는 결혼생활이라고 한다. 그만큼 생각했던 업무와 실제 업무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애초에 IT 프로젝트 매니저의 포지션으로 입사를 했음에도 나의 IT 전문성을 살리기 보다, 비용승인, 계약처리 등등의 어드민성 업무가 주어졌고, 프로젝트 수행보다 어드민성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훨씬 많이 빼앗겼다. 특히나 매니지먼트의 오판으로 10억 이상의 금액이 모자라는 계약을 성사시키라는 업무가 주어졌을 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나는 내 IT 전문성을 뼈대로 삼고, 프로젝트 관리 역량과 영어 능력을 더해 내 커리어를 만들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IT 전문성을 갈수록 빼앗아 가는 업무 환경에서는 내가 오래 있을수록 커리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얻은 것들

의 6개월 이상 노력한 끝에 이직을 성공해 이 회사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이 회사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었다. 내가 SK에서 인정받고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신입 사원으로 입사해 바닥에서부터 나의 평판을 쌓아올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력으로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사람 간의 관계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입사원으로 자연스럽게 회사 문화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보다 나의 노력이 훨씬 들어가는 일이다. 내가 원치 않던 업무이기는 했지만, 50억 가량의 계약을 처리하며 큰 돈을 관리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맡았던 30억 가량의 프로젝트 역시 규모가 큰 프로젝트로 내 전체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맡았던 6개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