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에 처음 재미를 붙여가는 시절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 당구공이 왔다갔다 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열정을 가진 것은 자나깨나 생각이 난다. 나에게는 사진도 그런 것이다. 환상적인 빛이 드리워진 최적의 장면을 만났는데 손에 카메라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카메라를 들고 나오면 그 장면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 너무나 진한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난다. 나는 종종 이런 꿈을 꾼다.

그래서 손에 항상 카메라가 있어야 한다. 메인으로 사용하였던 소니 A7R2나 지금 사용하고 있는 소니 A9과 시그마 SD1 Merrill은 한 손에 휴대하고 다니기에는 크기가 큰 편이다. 물론 A9에 35mm 2.8 렌즈를 하나 물리면 들고 다닐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부담없이 항상 소지할 수 있는 카메라를 찾아 다녔다. 내가 데일리 카메라로 선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 적어도 APS-C 이상의 포맷으로 화질이 뛰어날 것
  • 휴대성이 뛰어나 부담없이 가지고 다닐 수 있을 것
  • 줌렌즈가 장착되어 원하는 장면을 유연하게 찍을 수 있을 것

위의 세가지 조건을 다 만족하는 카메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샀던 컴팩트 카메라는 시그마 DP2s였다. 일단 이 놈은 단렌즈인데다가 기계적 성능이 너무 구려 순간적인 스냅사진을 포착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놈을 내치고 들인 것이 파나소닉 LX100이다. 이 놈은 표준영역의 줌렌즈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포서드 센서로 1.0인치보다는 크지만 크롭센서에 비해서는 화질이 좋지 않았다. 다음으로 샀던건 시그마 DP2 Quattro이다. 이건 휴대성보다는 포베온 센서 때문에 다시 들였는데 기괴하게 생긴 디자인으로 주머니에는 절대 넣을 수 없었다. 이 놈을 내치고 다시 시그마 DP2 Merrill을 들였다. 거의 표준화각에 가까운 단렌즈에 화질도 괜찮아서 꽤 자주 들고 다녔다. 작은 크기이지만 포베온 센서의 괴물같은 화질 덕분에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나 DP2s와 비슷하게 기계성능은 구려 스냅을 찍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DP2m의 크기는 컴팩트 카메라이지만, 내가 각잡고 정적인 사진을 찍을 때 오히려 적합한 카메라다.

기괴한 디자인의 dp2 Quattro

DP2m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위의 조건 중에 줌렌즈여야 한다는 조건이 조금은 희석되었다. 줌렌즈는 내 의도대로 장면을 만들어 낸다면, 단렌즈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프레임을 찾아내는 맛이 있다. 줌렌즈를 이용할 때와 단렌즈를 이용할 때 사진을 찍는 철학이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줌렌즈 조건을 빼고 생각하니 눈에 들어오는 놈이 꽤 많았다. 바로 후지 x100F 모델이다. 클래식한 외관과 후지 특유의 JPG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후지 x100F의 리뷰를 수천 수만번 본 것 같다. 그런데 구매 직전에 휴대성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아무리 작은 카메라여도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으면, 따로 가방을 들어야 하고, 카메라가 가방에 들어가는 순간 손에 들고 있을 때보다 사진을 찍을 확률이 매우 낮아진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카메라는 소니 RX100 시리즈 정도일텐데, 나는 1.0인치 센서에 만족할 수가 없다.

단렌즈라서 배제되고, 집중된 프레임을 좋아하는 나의 특성상 너무 넓은 화각(28mm)라 제외되었던 리코 GR시리즈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스냅 머신이라 불릴만큼 기민하게 반응하고 휴대성도 좋고, 크기는 엄청나게 작은데 크롭 센서에 관용도도 뛰어나다는 평이 많았다. 내가 28mm 화각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카메라를 휴대하지 못해 아예 장면을 놓치는 것보다는 28mm가 적합한 시점에 찍을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달 여간의 고민 끝에 리코 GR3는 내 손에 들어왔다.

고민은 배송을 늦출 뿐…

귀여운 GR3의 모습

일단 리코는 작다. 너무나도 작다. 다른 컴팩트 카메라와 차별점은 ‘주머니에 들어갈만큼’ 작다는 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갤럭시8보다 작다. (물론 두께는 좀 더 두껍지만) 또 다른 장점은 구동속도가 0.8초 정도로 빠르다는 것이다. 주머니에서 꺼내고 전원을 켜고 사진을 찍는데까지 1초면 충분하다. 말 그대로 스냅에 특화된 카메라인 것이다. 포지티브 필름 모드는 사진의 느낌도 훌륭하다. RAW로 촬영해 카메라 기기 내에서 다른 프리셋을 적용하는 후보정도 가능하다. 이 기능은 컴퓨터로 사진을 옮기지 않고 후보정을 해서 SNS에 업로드 할 때 굉장히 유용한 기능이다.

오른쪽에 몰려있는 버튼들

이 작은 카메라의 놀라운 점은, 생각보다 그립감과 조작감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버튼이 오른쪽으로 모두 몰려있고, 한 손에 잡은 채로 왼손을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의 조작이 가능하다. 크기, 구동속도, 조작 편의성까지 스냅을 위해 태어난 카메라라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단점을 찾아보자면 배터리가 그다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건 출퇴근길 스냅용이라면 타협할만한 요소다. 200장 정도는 거뜬히 찍을 수 있으니 스냅용으로는 충분하다. 그 이상 찍을 시간이 있는 상황이라면 메인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게 나을테니까.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GR3는 스냅을 위해 태어난 카메라’이다. 카메라가 아무리 좋아도 내 손에 들려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GR3의 가장 큰 장점은 여름옷을 기준으로 해도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 그래서 항상 휴대할 수 있는 카메라라는 것이다.

한 달 동안 GR3로 찍은 사진들을 소개하면서 사용기를 마무리 한다.